글쓰기라는 외로움

by 배대웅

앞서 나는 글쓰기가 즐거움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즐거워야 지속할 수 있고, 지속해야 나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즐거움은 결코 ‘쉬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온전히 맛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둡고 긴 터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로움’이다.


겉으로 보면 글쓰기는 타인을 향한 행위다. 불특정 다수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고, 이해와 공감을 기대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글을 완성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내면을 붙잡고 나아가야 한다. 이 점에서 글쓰기는 완벽하게 고립된 작업이다.


이 외로움은 단순히 혼자 작업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얼마나 많은 고뇌가 그 안에 스며드는지.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 몇 번이나 생각을 되돌리고, 단어 하나를 고르기 위해 머릿속을 뒤지는 그 과정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독자가 읽는 것은 깔끔하게 정리된 결과뿐이다. 그 뒤에 쌓인 수많은 시행착오와 망설임,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고군분투


그래서 글쓰기는 철저히 개인적인 싸움이 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문장이 맞는지, 이 논리가 타당한지, 이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대신 내려줄 사람은 없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이 외로움을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에게만 열린다.


이러한 고립은 글을 쓰는 시간뿐 아니라, 글을 쓰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특히 직장 일을 병행하면서 글을 쓰는 겸업 작가라면 이런 질문이 날카롭게 다가온다. “나는 왜 이걸 하고 있는가?”


일과 후의 남은 시간을 쪼개 글을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피곤한 날에는 쉬거나 기분전환을 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책상 앞에 앉게 만드는 것은 외부의 보상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 그 보상은 너무 멀리 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글은 아무 반응 없이 지나간다. 공들여 쓴 글의 조회 수가 안 나오기도 하고, 기대했던 만큼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 공모전에 응모하면 떨어지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도 답이 없는 일이 반복된다.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글쓰기는 점점 더 짙은 허무 속에 갇힌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설득하며 계속 써야 하는 순간, 글쓰기는 선택이 아니라 질문이 된다. “그래도 나는 이걸 써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외부에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주변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말을 건넬 가능성이 크다. “그걸 굳이 왜 해?”, “누가 칼 들고 협박했어?”라는 말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따져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시간 대비 효율을 따지면 글쓰기는 매우 비경제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쓰는 사람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버린다. “그럼에도 나는 이걸 써야 한다.”


이 한 문장을 납득하지 못한다면 글쓰기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겸업 작가에게는 이 점이 더 분명하게 요구된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스스로 만든 확신 하나만을 붙들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나는 독자의 반응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기대어 글을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수준에 맞게 글을 완성하는 것, 그것만이 글쓰기의 이유이자 기준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불리할 때가 많다. 많은 사람에게 읽힐 글을 쓰는 데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고, 글에 즉각적인 반응을 얻어내기도 쉽지 않다. 대신 확실한 한 가지를 얻는다. 내가 쓰는 글의 방향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쓰고 그것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것. 바로 그 과정이 글쓰기를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구도자, 혹은 마조히스트


이 지점에서 글쓰기는 일종의 종교적 수행과 닮아간다. 구도자(求道者)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고행을 자처하듯, 글 쓰는 이 역시 가시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묵묵히 문장을 이어간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나 플랫폼의 스타가 되는 행운이 따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결과일 뿐이다.


글쓰기의 진짜 목적은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제보다 더 나은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자기만족, 즉 나만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려는 내면의 욕구에 있다. 그래서 때로 작가는 스스로를 ‘지적 마조히스트’의 상황으로 밀어 넣는다. 난해한 개념을 파고들고 고도의 지식을 문장으로 엮어내는 과정은 분명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과해 하나의 세계를 구현했을 때 찾아오는 희열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


나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연구소의 승리』에 수록될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역사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썼을 때다. 문과 출신인 내게 표준모형과 힉스 메커니즘 같은 현대 물리학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100% 이해되지 않는 이론들을 구도자의 심정으로 외우고 씹어 삼킨 뒤에야 내 나름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었다. 그 지독한 고행 끝에 글을 마쳤을 때, 나는 이해되지 않던 세계의 일부를 내 문장 안에 겨우 가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감성 에세이가 주류인 브런치에서 이런 난해한 글은 완벽한 흥행 참패 카드였다. 독자들의 싸늘한 반응을 예감하며 발행 버튼을 눌렀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설정한 난도를 끝까지 고수했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완성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 글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결과가 돌아왔다. 대체적인 반응은 조용했지만, 몇몇 독자들이 남긴 댓글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해해 보려고 두 번이나 정독했지만 끝내 다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한 문장은, 수십 개의 가벼운 공감보다 훨씬 더 울림이 컸다. 그 문장에는 읽는 과정에서의 고통과 노력,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내려 한 진지한 태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글을 쓰며 겪은 고행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구도자들은 각자 종교는 달라도 고행의 의미는 알아본다. 글 쓰는 사람들도 서로의 문장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시간을 짐작한다. 한 문장 뒤에 얼마나 많은 시도와 반복이 있었는지,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까지 어떤 고립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직감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혼자 쓰지만,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더 나은 글’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준을 향해,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이 외로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다.


면도사의 철학과 글쓰기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에서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라는 서머셋 몸의 문장을 인용했다. 사소하고 지루하며 반복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해내는 사람에게는 고유한 철학이 깃든다는 뜻이다. 글쓰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다.


실제로 글쓰기는 화려한 재능이 아니라 지루한 반복에 가깝다. 하루아침에 필력이 좋아지는 기적은 없다. 어제와 비슷한 문장을 고치고,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을 다시 가다듬는 일을 끝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자리걸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지루한 반복 속에서 미세한 균열과 변화가 일어난다. 문장의 호흡이 0.1초 짧아지고, 단어를 고르는 감각이 한 뼘 더 정교해진다.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들이 수천 번, 수만 번 쌓이면 비로소 한 사람의 문체가 되고 철학이 된다. 매일 같은 동작으로 수염을 깎지만 결코 같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면도사처럼, 우리도 매일 외로운 반복을 지속하며 자신만의 철학을 빚어내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처럼 노력한 만큼 결과로 돌아오는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아주 정직한 과업이다. 우리가 쏟아부은 고독한 시간과 외로운 반복은 그대로 문장 속에 남는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그 외로움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신의 글이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이며, 당신만의 철학이 깃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결국 글쓰기란 이 외로움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이다. 고독을 견디는 것을 지나, 그것을 전제로 쓰는 단계로 넘어가는 일. 이 지점에 이르면 즐거움은 더 이상 우연히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다. 반복 속에서 스스로 생성되는 힘이 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늘 내가 쓴 문장이 어제의 나를 넘어섰다는, 그 고요한 확신만 들면 된다. 글쓰기의 본질은 그 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 속의 커서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한 문장을 밀어붙인다. 이 외로움이 끝내 나의 문장이 되고, 나의 철학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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