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힘들고 외롭지만 남는 것도 있다. 하긴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사람이 이 일을 계속 붙들고 있을 리 없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도 한번 시작하면 좀처럼 내려놓지 못하는 일이 글쓰기다. 그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단순하게 부르면 ‘보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보람을 첫 책 『최소한의 과학 공부』가 나왔을 때 가장 강렬하게 느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쇄가 막 끝난 책을 집어 들어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라고 했다. 나는 그 행복이 나와는 평생 무관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득하게 느껴졌던 그 문장이 어느 날 내 현실로 들어왔다.
늘 남의 책을 사느라 들락거렸던 알라딘과 교보문고에 내 책과 내 소개가 올라와 있었다. 예스24에서는 ‘오늘의 책’으로 선정되어 대문에까지 걸렸다. 그걸 보면서 예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던 어느 가수의 일화가 떠올랐다. 데뷔 앨범을 낸 뒤 길거리를 걷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자기 노래가 흘러나오더란다. 그게 너무 신기해서 가게로 들어가 자기 앨범을 돈 주고 샀다고 한다. 나 역시 출판사에서 증정용으로 보내준 책들이 있었지만, 굳이 인터넷 서점에서 직접 한 권 주문해 봤다.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고, 수많은 독자 앞에서 강연하는 경험도 달콤했다. 40년 넘게 살면서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라는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깨달은 적이 없었다. 인생에 어떤 기회가 있을지 따져보지 않고, 묵묵히 글을 써온 시간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출간의 흥분은 생각보다 빨리 가라앉는다. 책은 영원히 팔리지 않고, 강연 요청도 매일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의 관심은 빠르게 다음 책으로 옮겨간다. 어느새 나는 다시 평범한 회사원으로 돌아와 있었고, 두 번째 책을 준비하며 첫 책을 쓸 때의 그 막막한 골방으로 처박혔다. 이렇게 보면 출간의 기쁨은 글쓰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가장 본질적인 힘은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의 보람은 그 이후의 평범한 날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로 삶의 내용이 풍부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한정된 시간 안에서 산다. 겉으로는 모두 비슷한 하루를 보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 나는 이전까지 회사원으로서 1차원적인 삶을 살았다. 출근과 퇴근, 보고와 회의로 점철된 단조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작가'라는 또 다른 정체성이 생기니 같은 하루가 전혀 다른 구조로 바뀌었다. 남들처럼 시간을 소비하는 대신, 그것을 사용해서 사유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겸업 작가의 삶은 고되다. 남들이 넷플릭스를 보거나 잠을 잘 때, 읽고 쓰는 정신노동을 이어가야 하니 피로도가 높다. 하지만 이 수고는 단순히 일을 하나 더 얹는 데 그치지 않는다. 회사 업무가 주어진 틀 안에서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그 틀 자체를 벗어나 나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같은 경험을 겪어도 한 번 더 생각을 끌어내고, 그것을 언어로 고정시키는 순간, 하루의 두께는 이전과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또 하나의 삶을 덧붙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 안에서 생성되는 의미는 훨씬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고생은 분명 두 배다. 하지만 그만큼 삶도 두 겹으로 살아진다.
둘째로 회사에 덜 얽매이게 된다. 이것은 앞의 변화와도 연결되어 있다. 30대 때까지만 해도 회사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일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회사 밖에서 나를 붙잡아둘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충격이 삶 전체를 흔들었다. 조직 안에서의 평가와 분위기, 인간관계와 작은 부침들이 내 기분과 자존감을 쉽게 좌우했다.
그런데 글쓰기를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그 구조가 바뀌었다. 회사는 여전히 중요한 생계의 터전이지만, 더 이상 내 존재 전체를 규정하는 중심축은 아니다. 내 바깥에, 정확히 말하면 내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생긴 것이다. 이 변화는 한국의 경직된 조직문화 속에서 더 크게 다가온다. 대부분의 회사 조직에서는 개인이 아무리 탁월한 기량을 발휘해도 온전한 보상을 받기 어렵다. 성과가 나도 조직의 공으로 돌아가고, 상사들의 무관심 속에 묻히기 일쑤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람이 점점 무기력해지기 쉽다. 열심히 해도 차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글쓰기의 세계는 정직하다. 그곳에는 조직이라는 리바이어던이 없다. 내가 공들인 만큼 글의 퀄리티가 높아지고, 그 결과에 대한 스포트라이트는 오직 나 개인을 향한다. 이렇게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에 익숙해지면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회사 밖에 취미를 만드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의 무게중심을 조금씩 나로 옮겨오는 일이다. 내 삶에서 회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 내가 어떤 한 조직의 평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감각은 큰 해방감을 준다.
셋째로 아이의 교육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이건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가장 큰 보람이기도 하다. 나는 첫 책을 탈고하며 감사의 말에 이렇게 썼다. "딸이 이 책에서 세상살이에 도움이 될 작은 지식 하나 얻기를 희망한다. 그럼으로써 책을 쓴 아빠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주위에서는 본문보다 이 문장이 더 감동적이었다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쓸 때만 해도 일종의 바람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바람이 구체적인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집에서 내가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이다. 딸아이도 그 모습을 날마다 본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정확한 말이다. 집에서 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모습을 보며 자란 딸은 시키지 않아도 책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또래에 비해서 어휘력과 문해력도 꽤 좋은 편이다. 물론 이것을 전적으로 내 덕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아이마다 성향도 다르고, 여러 환경이 함께 작용할 것이다. 다만 집에 책과 글쓰기가 일상의 풍경처럼 놓여 있다는 사실이 좋은 영향을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가장 귀여운 장면은 내가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으면, 딸도 옆에 와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놓고 따라 하는 순간이다. 자기도 책을 쓸 거라면서. 놀이터에서 아이들끼리 “우리 아빠는 팀장이야”, “우리 아빠는 교수야”라며 자존심 대결을 펼칠 때마다, 딸은 “우리 아빠는 작가야”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나면서도 묘한 책임감이 생긴다. 적어도 아이의 눈에는 내가 회사원 이상의 존재로 보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많이 들고 돈은 잘 안 되는 겸업 작가 생활을 아내가 기꺼이 지지해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일이 당장 수익은 크지 않아도, 집의 분위기와 아이에게 남기는 흔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성과는 출간이나 유명세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출간 작가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경험은 분명 강렬하다. 그러나 그 봉우리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정상의 축제는 금세 지나가고 우리는 다시 평지로 내려와야 한다. 만약 그 찰나의 화려함만을 좇아 글을 쓴다면, 조명이 꺼진 뒤 찾아오는 공허를 견딜 재간이 없다. 진짜 보람은 봉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딛고 서있는 평지에 깃들어 있다.
글쓰기는 그 평지를 비옥하게 하는 일이다. 일상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만들고, 회사 바깥에도 삶의 축을 세우며, 내가 사는 방식을 하나의 모델로 드러낸다. 이 변화는 눈에 띄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그래서 글쓰기는 성과를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쌓는 방식에 가깝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라도 그 안에서 이루어진 판단과 선택은 그대로 남는다. 버린 줄 알았던 문장들이 생각의 습관으로 굳고, 한 번 밀어붙인 문장은 다음 판단의 기준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이쪽이 더 또렷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몇 번의 성공이 아니라, 그 과정을 반복하며 만들어지는 나 자신이다.
그러니 당신의 글이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독백처럼 느껴져도 멈추지 마시라. 그 고독의 끝에는 삶을 구원할 보람이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는 세속적인 성공을 약속하지 않지만, 삶을 허투루 지나가게 두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