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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07. 2023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상대성이론과 아인슈타인의 20세기

“이제 발견할 것은 다 발견했다. 물리학은 끝났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의 선언이었다. 대단한 호연지기다. 과학사에서 19세기는 고전물리학의 완성기다. 고전물리학이란 뉴턴의 역학과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의 전자기학을 의미한다. 이 두 체계가 완성되면서 운동, 전기와 자기 현상, 빛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가능해졌다. 물리학자들은 이로써 자연을 완벽히 설명해 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때까지 물리학의 성취는 대단했다. 학자들이 “우리는 이제 뭘 하나?”라고 걱정할 만도 했다. 적어도 1905년, 스위스 특허청의 26살짜리 공무원이 논문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었다. 이 해 그는 3편의 논문으로 200년 넘게 굳건하던 고전물리학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일과 중에는 특허 심사 업무를 하고 퇴근 후에 연구해서 이룬 결과였다. 성당 관리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고안하고, 백수였던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한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이 논문들은 그대로 뉴턴 이후의 물리학, 현대물리학이 성립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저 유명한 상대성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이 특허청 취직 전 어려웠던 시절에 붙였던 과외 전단지. 역사상 최강의 과외 광고로도 꼽힌다.



    

맥스웰과 갈릴레이의 상충

     

발단은 10년 전 소년 아인슈타인이 던진 질문이었다. “물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 어떻게 될까?” 물리 선생님은 “그럼 빛은 멈춘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 옛날 갈릴레이가 물체의 속도는 다른 물체와의 상대적 관계를 통해 결정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하철에서 건너편 열차와 동시 출발하면 속도가 느껴지지 않거나, 지구의 자전을 인지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속도의 상대성은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전제한다. 누가 어디서 측정하든 1초는 1초이고, 1미터는 1미터다. 이를 기준으로 관측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이는 인간의 직관적 경험과도 잘 들어맞는다. 고전물리학의 기본전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맥스웰의 전자기학과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맥스웰 방정식을 계산해 보면 좌표계와 무관하게 빛의 속도(c)는 항상 같아야 한다. 이렇듯 빛의 속도라는 중요한 물리적 문제에 대해 두 대가가 상충했다. 하지만 이내 맥스웰을 지지하는 실험 결과들이 나왔다. 1887년 미국의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Michelson)과 에드워드 몰리(Edward Morley)가 빛의 속도는 초속 30만 km에서 변하지 않음을 보였다. 많은 후속 실험이 있었으나 결과는 같았다. 맥스웰 방정식에는 오류가 없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의 헨드릭 로런츠(Hendrik Lorentz)는 맥스웰에 대한 갈릴레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변환식을 만들었다. 다만 이것은 말 그대로 모순 해결을 위한 수학적 기술에 가까웠을 뿐이다. 로런츠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새로운 이론의 개척은 아인슈타인의 몫이었다.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이 제기된 배경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재정의다. 고전물리학에서 사용해 온 시간과 공간 개념이 타당하지 않으니 새롭게 일반화하자는 이론적 시도였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맥스웰 방정식에 따라 빛의 불변 원리가 가장 근본적인 물리법칙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10년 전 물리 선생님이 말한 ‘빛이 멈춘 상태’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 개념이 상대화되어야 했다. 아인슈타인의 설명이다.

     

물론 오늘날 모두가 아는 것처럼, 시간의 절대성 즉 동시성에 대한 공리가 무의식 속에 고정되어 있는 한, 이 역설을 만족스럽게 해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오랫동안 실패로 판정되어 왔다.

    



빛의 속도 불변의 원칙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에는 빛의 속도라는 물리상수가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에게 빛의 속도는 전자기학의 법칙을 따르는 아주 독특한 존재다. 이것은 우주의 본질을 담지한 ‘우주 본연의 언어’다. 반면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언어’ 일뿐이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미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인간을 우주의 변방으로 추방하지 않았던가. 특수상대성이론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다.

     

빛의 모든 광선은, 정지된 좌표에서, 그것이 정지해 있는 또는 운동하는 물체 중 어디에서 방출되었는지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속도(c)를 유지하며 전파된다.

     

빛의 속도가 불변하려면 시간과 공간이 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둘은 어떤 방식으로든 얽혀야 한다. 고전물리학에서 시간은 공간과 관계없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1차원)과 공간(3차원)이 시공간(4차원)으로 합쳐진다. 이렇게 얽힌 시공간에서는 공간을 빠르게 이동하면 시간이 느려지고, 반대로 느리게 이동하면 시간이 빨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황당한 일이 가능할까? 1971년 조지프 하펠(Joseph Hafele)과 리처드 키팅(Richard Keating)이 실험으로 검증했다. 이들은 8개의 세슘 원자시계를 준비했다. 그중 4개는 지상에 두고 4개는 제트기에 태워 지구를 빠르게 돌았다. 비행이 끝난 후 비교해 보았다. 제트기에 태웠던 시계가 지상의 것보다 10억 분의 59초 더 느렸다.

1971년 특수상대성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한 조지프 하펠과 리처드 키팅, 그리고 실험에 쓰인 세슘 원자시계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상징하는 E=mc2(E: 에너지, m: 질량, c: 빛의 속도)도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흔히 엠씨스퀘어로 알려진 이 공식(한때 집중력 향상 기계 이름으로도 유명했다)은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로 불린다. 즉 에너지와 질량은 같은 본질의 다른 형태이며 서로 변환될 수 있다. 이때 에너지와 질량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빛의 속도를 제곱한 c2(초속 30만 km의 제곱)다. 이는 아주 작은 질량일지라도 c2를 곱하면 대단히 큰 에너지가 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그 방법은 아인슈타인도 몰랐다. 하지만 이 가능성이 현실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38년 오토 한(Otto Hahn)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이 우라늄 원자핵의 분열에 성공했다. 이때 분열된 원자핵은 E=mc2 공식대로 줄어든 질량을 엄청난 에너지로 변환했다. 인간이 원자폭탄과 원자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휘어지는 시공간

     

특수상대성이론은 등속운동의 경우에만 적용되었다. 아인슈타인은 10년의 노력 끝에 이를 가속운동에까지 확대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을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을 확립한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뉴턴의 중력 이론을 재해석했다는 데 있다. 그 발단이 된 아이디어는 우리가 흔히 느끼는 관성력을 중력의 효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관성력이 가속운동 때문에 생기며 이는 본질적으로 중력과 같다고 보았다. 그런데 특수상대성이론에서는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시간과 공간이 변화한다. 만약 가속운동을 한다면 변화 폭은 더욱 커진다. 그러면 4차원의 시공간에 굴곡이 생겨서 결국 휘어질 것이다. 이로써 중력의 본질은 시공간의 휘어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시공간이 변한다는 특수상대성이론도 잘 적응이 안 되는데,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아예 휘어지기까지 한다고? 이 놀라운 이야기도 실험으로 입증되었다. 1919년 영국의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 연구팀이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찍은 별의 사진이 증거가 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별빛은 중력이 강한 태양 부근을 지나면서 휜다. 에딩턴 팀은 개기일식으로 태양 빛이 약해진 틈을 타 찍은 별 사진으로 빛의 휘어짐을 계산해 보았다. 그 정도는 고전물리학보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예측값에 더욱 가까웠다. 이 실험 결과는 아인슈타인을 대중적으로도 유명하게 만들었다.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일간지 더타임스(The Times)는 “과학의 혁명, 우주의 새 이론, 뉴턴의 생각이 뒤집히다”라고 대서특필했다.

1919년 11월 7일 더타임스는 일반상대성이론의 실험적 검증을 대서특필했다.


1921년에는 (당연하게도) 노벨물리학상도 받았다. 보통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수상 근거는 이렇다. “이론물리학에의 공헌, 특히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for his services to Theoretical Physics, and especially for his discovery of the law of the photoelectric effect)” 즉 광전효과 규명이 더 명확한 수상 이유다. 아마 노벨재단은 ‘이론물리학에의 공헌’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상대성이론 업적을 퉁친 것 같다. 그만큼 상대성이론은 혁명적이었고 과학자들이 수용을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다만 아인슈타인은 수상 소감의 대부분을 광전효과가 아닌 상대성이론에 할애했다.



     

20세기의 인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1999년 12월 송년호에서 지난 1,000년 간 각 세기의 인물을 선정했다. 칭기즈칸(13세기), 구텐베르크(15세기), 뉴턴(17세기) 등 역사책의 몇 장쯤은 너끈히 쓸만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렸다. 20세기의 인물로는 아인슈타인이 선정됐다. 20세기는 제국주의, 세계대전, 자본주의 황금기, 냉전, 신자유주의 등 굵직한 사건들로 점철된 격동기였다. 그런데도 정치가, 기업가, 군인이 아닌 아인슈타인이 뽑혔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아인슈타인을 고전물리학의 시대(~19세기)가 끝나고 현대물리학(20세기~)이 시작되는 기점으로 본다. 아인슈타인이 수백 년간 고전물리학이 작동해 온 기본전제를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뉴턴역학이나 전자기학이 아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창조했고 양자역학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은 인류의 세계관까지 변화시켰다. 고전물리학을 떠받치는 세계관은 결정론이다. 원인을 알면 결과도 예측할 수 있다. 과학의 강력한 지적 권위는 결정론에서 기인했다. 결정론 덕분에 주술과 미신의 영역이었던 미래 예측이 이성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근대 과학혁명은 곧 결정론적 세계관이 인류의 사고체계를 지배해 가는 과정이었다. 아인슈타인도 결정론자라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다르지 않았다. 사실 특수상대성이론도 맥스웰의 물리법칙을 정교화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역설적으로 결정론적 세계관에 타격을 입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한 것이 뇌관을 건드렸다. 이렇게 핵심 전제가 무너지자 고전물리학의 권위는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정치적으로도 20세기의 격동과 맞닿는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1949년 미국의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기고한 ‘왜 사회주의인가?(Why Socialism?)’라는 글이 유명하다. 냉전의 위협과 매카시즘의 광풍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인류사 최고의 천재 자리를 다투는 아인슈타인의 사회주의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먼슬리 리뷰》는 1998년과 2009년의 창간 기념호에도 이 글을 게재했다.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정치적 위험 인물로 지목해 감시했다. 아인슈타인이 FBI의 의심처럼 소련과 내통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혁명보다는 윤리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세계평화를 실천할 세계정부의 설립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는데, 1955년 사망 직전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다. 핵전쟁 위험을 경고한 이 선언은 2년 후 핵무기를 반대하는 과학자 모임인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로 이어진다. 그는 1939년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belt)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핵무기 개발을 촉구했었다. 그러나 핵무기의 위력을 목격한 뒤에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반성의 취지에서 반핵과 평화주의 활동을 했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시오니즘 운동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이스라엘로부터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뜻밖에도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31년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대표작 ‘기억의 지속’은 해변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시계들의 이미지가 유명하다. 녹아내린 시계 속에서 정지한 시간은 상대성이론에서 느려지는 시간과 닮았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1953년 판화는 제목부터 아예 ‘상대성’이다. 공간 안에 그려진 계단들은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 불분명하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듯 20세기 예술에서 상대성이론은 주체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사물의 실제를 다르게 볼 수 있음을 함의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큐비즘(cubism)과도 상통한다. 최초의 큐비즘 작품으로 통하는 ‘아비뇽의 처녀들’은 고정된 한 시점이 아닌 여러 시점에서 보이는 것을 종합해서 그렸다. 피카소는 이렇듯 여러 군데에서 사물을 들여다봐야 본질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시대의 화가들이 물리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면서, 그 이론적 발상이 예술적 작법에도 영감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받은 20세기 예술 작품들. 위쪽 '시간의 지속(달리)', 아래 왼쪽 '상대성(에셔)', 아래 오른쪽 '아비뇽의 처녀들(피카소)'

처음의 문장으로 되돌아가보자. 물리학이 끝났다는 19세기의 선언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발견할 게 더 없다”던 완성론자도, “이제 뭘 해야 하냐”던 비관론자도, 아인슈타인의 참교육 앞에서 데꿀멍해야 했다. 물리학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아인슈타인조차도 난감해했던, 양자역학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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