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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03. 2023

역사도 생물처럼 진화한다

진보사관과 역사의 과학화

1851년의 런던 엑스포. 오늘날 세계박람회의 기원이 된 대회다. 하이드파크에 건설된 주 전시장 수정궁(Crystal Palace)이 크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너비 564m에 달하는 초대형 건물을 벽돌 하나 안 쓰고 철제와 유리로만 지었다. 이름 그대로 환상 속의 유리 궁전처럼 보였다. 영국의 첨단 기술로 지은 세계 최초의 철골 건축물이었다. 이걸 본 라이벌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야, 우리는 걔들보다 더 크고 높게 지어!” 1889년 파리 엑스포 개막에 맞춰 마르스 광장에 높이 300m짜리 철골 탑이 위용을 드러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파리의 랜드마크 에펠탑도 그렇게 국력 과시용으로 만들어졌다.


수정궁과 에펠탑은 19세기의 시대정신과 맞닿는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가 이룬 번영과 발전을 상징한다. 어떻게 그런 시대가 가능했을까?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유럽에 100년 평화가 찾아왔다. 각국은 경쟁적으로 산업을 육성하고 과학 연구를 지원했으며 기술자도 양성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혁신이 일어나 인류의 생활양식을 크게 바꾸었다. 철도, 여객선, 자동차, 전화, 비행기, 그리고 수세식 변기까지. 현대인이 누리는 삶의 원형이 이때 만들어졌다. 기술혁신은 거대한 부를 창출했고, 자유무역을 매개로 다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평화, 산업, 기술, 무역이 만들어 낸 부의 선순환이었던 셈이다. 통계로도 확인된다. 서유럽의 1인당 GDP는 1820년 1,243달러에서 1900년 3,076달러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이 시대를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부른다.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의미다. 정치적 안정, 경제적 번영, 사회적 낙관, 문화적 여유가 절정에 올랐던 시대였다.


     

역사의 발전과 진화론

     

역사가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믿음이 이 시대에 깔려 있었다. 이를 진보사관(進歩史観, idea of progress)이라고 한다. 이전까지 역사란 그저 흘러간 시간, 과거로 끝난 일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현재와 미래로 연결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학혁명을 계기로 인식이 바뀌었다. 과학적 지식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여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라는 언명, 데카르트의 보편수학 기획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뉴턴이 우주와 지구의 이치를 종합함으로써 자신감은 현실이 되었다. 뉴턴의 세례를 받은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의 힘을 앞세워 진보의 실천에 앞장섰다. 마침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인류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역사의 진보는 누구나 받아들이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리고 다윈과 『종의 기원』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이 책을 생물학 서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사회에도 적용되는 보편 법칙이라고 이해되었다. 책이 나온 1859년은 2차 산업혁명이 폭발하던 영국 최대의 번영기였다. 게다가 영국은 경제학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맬서스, 스미스, 리카도 등 경제학의 창시자들은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놔두면 국부는 알아서 늘어난다고 했다. 영국은 이걸 국가정책으로 받아들여 큰 부를 쌓았다. 이 시대에 경쟁은 곧 진보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빈부격차도 심각했다. 무한경쟁을 장려하면서 나타난 사회적 부작용이었다. 그런데도 영국 정부는 되려 빈민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1834년 제정된 신빈민법(New Poor Law)이 그랬다. 이 법은 빈민층에 최소한의 호흡기 역할을 하던 최저임금 보조체계를 폐지했다. 그럼으로써 빈민들이 열악한 조건의 노동이라도 마다하지 않도록 유도했다. 이 정책의 저변에 깔린 논리는 이러했다. 빈민들은 태생적으로 게을러서 빈민이 되었다. 그러니 인구 균형을 위해서라도 이들이 도태되도록 두어야 한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제시한 처방을 그대로 정책화한 것이었다. 당시 런던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1837년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에서 아주 리얼하게 묘사했다.



     

스펜서와 자유주의 진보사관

     

스펜서는 벨 에포크 시대의 자유방임 사회철학을 대표한다. 그는 『종의 기원』 출간 전에 이미 진화 원리에 기초한 사회연구의 비전을 제시했다. 스펜서의 주장이다.

     

이와 같이 연속된 분화를 통해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가는 진화(evolution)는 지구의 발전에서 생명의 발전, 혹은 사회, 정부, 공업, 상업, 언어, 문학, 과학, 예술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펜서에 의하면 사회적 행위에 개입하는 원인은 너무 복잡하고 결과 예측도 어렵다. 따라서 모든 일은 스스로 이루어지게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면 적자생존 원리에 의해 열등한 자들은 도태되고 우수한 자들만 살아남으면서 사회가 알아서 발전한다. 사회를 개혁해보겠다고 간섭해봐야 전혀 엉뚱한 결과만 나올 것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현실은 사회의 진화에서 발생하는 필요악일 뿐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입론에 다윈은 더없이 좋은 과학적 근거였다. 다윈은 스펜서가 자연선택의 의미를 적자생존으로 치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자연이 반드시 적자나 강자만을 선택하지 않으며, 선택된 변이가 꼭 개체에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스펜서는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이나 같은 개념이라고 맞받아쳤다.


결국 스펜서가 다윈에 판정승을 거뒀다. 원래 다윈은 『종의 기원』 초판에서 신중하고 방어적인 논조를 견지했다. ‘진화’라는 명사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그 예다. 그러다 엉뚱하게도 사회학자인 스펜서가 적자생존과 진화의 개념을 유행시켰다. 다윈은 스펜서의 용법이 학문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자신의 의도를 좀 더 단순명료하게 전달함을 인정했다. 이에 『종의 기원』 5판부터는 다윈도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을 모두 사용했다.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진화라는 명사도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다윈의 이론이 진화론으로 불렸다. 다윈의 논지가 바뀌면서 사람들은 진화를 진보, 또는 발전과 연계되는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이렇게 다윈의 동조에 힘입어 후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진보사관 

    

진화론의 사회적 적용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학자가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다. 의외로 마르크스와 다윈은 접점이 꽤 있었다. 둘은 동시대 영국에서 연구했으며, 사는 곳도 불과 20마일 거리였다. 『종의 기원』을 읽은 마르크스가 다윈에 대해 호평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마르크스가 주저 『자본(Capital)』을 다윈에게 헌정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헌정설’은 1930년대 소련에서 제기되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전후 맥락을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소위 헌정설은 다윈이 남긴 편지를 잘못 해석한 서지학적 오류, 또는 마르크스와 다윈을 무리하게 끼워 맞추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마르크스, 프로이트, 다윈을 꼽는다. 이들은 인간의 본질과 기원에 대해 기존에 생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답을 내놓았다.


다만 다윈과 마르크스가 서로 연결될 만한 개연성은 있었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과 혁명의 도식은 다윈의 생존투쟁을 통한 진화 논리와 친화적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스 필생의 과업은 사회주의를 과학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이에 기존의 낭만적 사회주의 경향들을 배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했다. 마르크스도 과학을 신뢰한 진보사관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역사상 최고의 생산력 발전을 이룬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성과에 경탄했다. 다만 그조차도 역사의 한 단계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또 다른 진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벨 에포크의 화려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현실을 철학의 핵심 과제로 둔 것이다. 이러한 입론은 세 가지 점에서 기존 진보사관과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세상만사를 결정하는 근본 원리는 물질에 있다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마르크스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이념과 사상, 그 연장으로서의 정치와 제도까지 지배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역사는 이성이나 정신 같은 추상의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실체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에 따라 발전한다.

 

둘째는 계급이다. 근대철학에서 사회의 기본단위는 개인으로 상정된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이러한 개인주의를 극단까지 몰고 간 경우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파편화된 개인은 역사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계급’이라는 물질적 이해를 공유하는 집단을 역사의 주역으로 제시했다. 역사는 유한한 물질자원에 대해 발생하는 계급 간 착취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규정하는 시대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가 해소되는 단계다. 그래서 역사 발전의 최종점이 된다.

 

셋째는 실천이다.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의 이론화에만 그치지 않았다. 강력한 실천적 당위성도 부여했다. 마르크스에게 이론과 실천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론은 실천을 전제로 존재하며, 실천은 이론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즉 역사는 공짜로 발전하지 않는다. 인간이 직접 역사에 개입해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 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다윈, 스펜서, 마르크스의 후예들

     

다윈, 스펜서, 마르크스에게 역사란 그저 시간의 흐름이 아니었다.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과 사회의 기저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었다. 세 사람은 그 법칙을 나름의 과학으로 규명했다. 진보사관은 이러한 과학에 대한 믿음이 철학과 역사학으로 투영된 결과였다. 특히 스펜서와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은 20세기를 양분하는 사상운동으로 발전했다. 


사회진화론은 독점자본가와 제국정치가의 지지를 받았다. 19세기는 자본주의적 경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서로 경쟁하던 다수의 자본은 몇몇 독점자본으로 통합되었다. 이는 다시 국가와 결탁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로 변모해 갔다. 이 과정을 독점자본가와 제국정치가가 주도했다. 사회진화론은 부의 축적을 정당화해주는 과학적 근거가 되었다. 이에 따르면 독점자본가들은 자본주의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는 적합성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성공은 자연 및 과학의 법칙과 일치하며 사회에도 이로운 일이 된다. 일례로 미국의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대기업의 성장은 자연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라고까지 역설했다. 이는 정부를 비롯한 누구도 경쟁에 개입하거나 그 결과를 왜곡하면 안 된다는 극단적 자유방임주의와 공명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는 제국주의도 같은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그 또한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적자생존이 약육강식으로 바뀌는 데에는 많은 논리적 단계가 필요치 않았다.

 

비단 유럽 제국주의자들만 사회진화론을 떠받든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침략 대상으로 삼았던 아시아에서도 사회진화론은 유행했다.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조선의 유길준 같은 지식인들은 19세기 국제정세를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유럽이 가진 힘의 근원을 파악해 그들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물론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했다. 일본만이 메이지유신이라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일본 1만 엔 지폐의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2024년 시부사와 에이이치로 교체 예정)는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국가발전전략을 제시했다.


사회진화론의 반대자들은 마르크스주의 깃발 아래로 모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국가 소련이 탄생했다. 본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영국을 사회주의 혁명의 유력 후보로 생각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본주의에 이르지도 못한 러시아가 혁명을 성공시켰다. 소련은 비슷한 처지의 저발전 국가들에 혁명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그 결과 20세기 지구상의 절반 정도 되는 국가가 소련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사회진화론이 그랬듯 이 과정도 그리 평화롭지는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 발전에 역행하는 자본가와 지식인 등의 반동(反動) 분자를 타도하면서 혁명을 완성해 나갔다. 그리고 소련이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한 2차 세계대전은 어떤 면에서는 사회진화론과 마르크스주의 간의 전쟁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냉전이 시작되면서 비슷한 전쟁이 형태만 달리하여 계속되었다. 냉전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주의가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비로소 끝났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사회를 개조하는 수단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역사의 진보를 확신할 수 있었다. 19세기 진보사관은 인류의 이러한 인식체계를 반영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진보사관을 따른 이들은 각자의 방법대로 역사 발전을 이루려 했다. 제국주의, 혁명, 세계대전, 냉전 등 20세기 세계사의 격동은 그 필연적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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