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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10. 2023

나의 레어템 자랑

feat. 책, 피규어, 음반

나는 자랑할 게 별로 없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어디서나 보는 흔한 중년남이라 그렇다. 내 또래들의 사교생활에 소비되는 자랑템은 보통 돈, 명예, 지위다. 공교롭게도 나한테는 없는 것들이다. 그나마 브런치 작가라는 지위(?)를 좀 자랑할만하다. 그런데 이것도 같은 브런치 작가들과 비교하면 자랑의 비교우위가 없어진다. 나는 등단 또는 출간한 작가도 아니고, 구독자 수도 적으며, 브런치 메인에 글이 걸린 적도 없어서다. 이렇게 적고 보니 좀 서글프기도 하다. 아니 이 나이 되도록 도대체 뭘 한 거야?

    

그래도 오늘은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어서 자랑을 해보려 한다. 나는 오늘 하루 행복했기 때문이다. 일단 전쟁 같은 일터에서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쳤다. 일과가 끝난 회사의 옥상에서 요요마의 연주를 틀어놓고 바라보는 석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그리고 존경하는 램즈이어 작가님께서 나의 변변찮은 글에 아주 멋진 시를 리플로 남겨주셨다. 얼굴도 모르는 분한테 이렇게 위로받을 수 있는 것도 브런치 작가만의 특권이겠지. 야구까지 이겼으면 완벽한 하루였을 텐데 아쉽다. 도대체 6회에 임찬규는 왜 바꾼 건데.

     

서두가 길었다. 내가 자랑하려는 것은 그동안 모은 레어템들이다. 사실 난 물욕이 별로 없다(아내가 인증해 줬으니 확실하다). 그런데 내 관심 분야에는 또 그렇지 않아서, 목표로 삼은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한다. 관심 분야는 크게 세 가지다. 책, 피규어, 음반. 목표물을 꼭 얻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돈으로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럴 돈도 없다. 레어템을 얻는 나의 방법은 아주 미련한 것이다. 조사와 발품이다. 인디언 기우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어코 걸릴 때까지 찾고 또 찾는다.



     

1. 책

     

책이야 브런치 작가라면 누구나 많이들 갖고 있으실 게다. 나도 특별히 책이 많지는 않다. 다만 내가 소장하는 책들은 분야가 좀 독특하다. 1980~90년대 사회과학 서적의 비중이 꽤 된다.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잘 보관해보려 한다. 그래서 나중에 어디 도서관이나 학술 단체 같은 곳에 기증할 생각이다.       


첫 번째로 소개할 레어템 책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다. 젊은 분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 지성사, 특히 비판적 사회과학에서 레전설로 남은 책이다. 요즘 한창 욕먹는 86세대 정치인 중에 이 책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서슬 퍼런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냉전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평화주의적(이라고 쓰고 사회주의적이라고 읽는다) 대안을 제시했다. 아마 베트남전쟁의 원인을 미국의 제국주의에서 찾은, 수정주의 경향의 첫 연구서일 것이다.

사진만 봐도 연륜이 느껴지지 않는가? 1979년 나온 10판이다. 책을 펼치면 퀴퀴한 냄새가 난다. 내가 관리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살 때부터 이랬다. 이 책은 2005년의 어느 날 학교 앞 헌책방에서 구했다. 당시 나는 리영희 저작을 열심히 읽던 순진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그날도 공강 시간에 헌책방에서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침 리영희의 데뷔작인 이 책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당장 사려고 했으나, 책이 너무 낡아서 사장님께 물어보았다. “사장님, 이거 너무 오래됐는데 최근 나온 판은 없나요?” 그랬더니 옆에서 책을 고르던 어떤 노신사께서 나를 흘깃 보더니 대신 대답하셨다. “학생, 뭘 모르나 본데, 그 책은 더 오래될수록 값진 거야. 나 같으면 그걸로 그냥 사겠네.” 나는 뭔가 노학자의 포스를 풍기는 그분 말씀에 곧바로 수긍했다. 그리고 단돈 2천원에 샀다. 그분 말씀대로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좀 아쉽다. 찾아보면 1974년 초판도 그 어딘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든 초판으로 구해볼걸.

      

두 번째 책은 위르겐 하버마스의 『후기자본주의 정당성 연구』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대표하는 사회철학자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웬만한 책은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그의 거의 유일한 정치경제학 저작이라는 희소성이 있다. 책이 나온 1970년대는 자본주의 황금기가 끝나면서 유럽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던 시기다. 하버마스는 이를 후기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체제적 위기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 정당성을 재구축하기 위해 초기 자유주의의 공론장 모델이 중심이 되는 토의민주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 책은 그나마 1988년 판이라 상태가 괜찮다. 사실 읽으려고 산 책은 아니다. 희소성 때문에 그냥 갖고 싶어서 샀다. 다만 당시 책값이 무려 3만원 대를 호가했다. 그렇게 비싸게 사고 싶지는 않아서 꽤 오래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1만2천원에 파는 곳을 발견하고 냉큼 샀다.




2. 피규어

     

피규어 수집은 아주 메이저한 취미다. 나는 야빠라서 야구 피규어만 모은다. 이쪽으로 유명한 맥팔레인이라는 미국 장난감 회사가 있다. 지금은 단종됐지만, 예전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실감나게 표현한 피규어 시리즈를 내놓았었다. 나는 한때 여기에 미쳐서 이걸 사들이는 데 혈안이 되었었다. 아마 100개쯤 모았을 거다. 똑같은 선수를 소속팀과 유니폼 색깔별로 나눠서 여러 개 샀다. 게다가 기존 모델에 능력자들이 새로 유니폼을 입힌 커스텀 모델까지 구했다. 그러다 애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그만뒀다. 지금은 서재 한구석에 처박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첫 번째는 켄 그리피 주니어의 수비 버전이다. 맥팔레인 MLB 피규어의 최고작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마스터피스다. 일단 한번 보시라.

담장에 올라 홈런 타구를 잡아내는 그리피가 살아 움직일 것 같지 않은가? 이 모델은 구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다. 가격이 문제였지. 그나마 20만원 선에서 선방했던 걸로 기억한다. 피규어 카페에서 안 어떤 마음씨 좋은 분에게서 싸게 살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수비 버전이다. 이거 꽤 비싸다. 비싼 이유는 모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평범한 양키스 모자가 아니다. 독립기념일 에디션으로서 로고의 NY가 성조기 문양으로 처리돼 있다. 피규어는 이렇게 디테일의 처리에서 가격 차이가 확 난다. 아래에 보면 600개 한정판 넘버링까지 있다. 이 독립기념일 에디션으로 나온 양키스 모델은 알렉스 로드리게스, 마리아노 리베라, 데릭 지터까지 셋이다. 어떻게든 셋을 구해서 독립기념일 완전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데릭 지터는 구할 수 없었다. 가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ebay에서 직구했는데, 20~30만원 선이었던 것 같다(아내가 이 글 보는 즉시 등짝 스매싱 예약행이다...;;)



     

3. 음반

     

음악은 대부분 스트리밍으로 듣는다. 그런데 소장 가치가 있는 명반이거나 저작권 때문에 스트리밍 서비스가 안 되는 앨범은 직접 음반을 구한다. 특히 J Pop 앨범이 이런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일본 여행을 1년에 두세 번씩 꼭 갔었다. 이때 필수 코스 중 하나가 중고 음반 가게 순례였다. 일본도 중고 음반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발품만 좀 팔면 득템이 쉽다.

     

첫 번째는 X Japan의 ‘발라드 컬렉션’ 앨범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레어템 중에 가장 구하기 힘들었다. 우리 세대에서 X Japan 음악 한번 안 들어본 이가 드물 것이다. 가장 인기 있는 앨범은 역시 데뷔작 ‘블루 블러드’였다. 그런데 하드락 밴드인 X Japan의 명 발라드만 추린 편집 앨범이 따로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X Japan의 많은 곡들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서비스 안 다. 이 ‘발라드 컬렉션’ 앨범도 통으로 못 듣는다. 그들의 발라드를 좋아했던 나는 어떻게든 이 앨범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국내에 유통 자체가 얼마 안 됐는지 매물이 진짜 없었다. 처음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없어서 오프라인으로 진출했다. 회현역 지하상가와 세운상가를 다 뒤져보았으나 그래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후쿠오카와 가고시마의 음반 가게를 죄다 돌아다녔다. 역시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중고 음반 사이트에 있는 걸 천신만고 끝에 살 수 있었다. 가격은 3~4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지금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알라딘 중고 사이트에 많이 올라와 있다. 대체 왜 그때는 이 앨범이 그렇게 없었던 거야. 그나마 싸게 산 걸로 위안을 삼는다.  


두 번째는 쿠와타 케이스케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인 ‘프롬 예스터데이(フロム イエスタデイ)’다. 이 J Pop의 슈퍼 레전드도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는 전혀 들을 수 없다. 역시 앨범을 사야 한다. 그런데 솔로와 밴드(사잔 올 스타즈)로 활동하면서 워낙 커리어가 길고 활동 스펙트럼이 넓어서 앨범을 뭘로 사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이 앨범은 솔로 활동 초창기인 1992년에 나왔다. 그래서 이것도 구하기가 쉽지 않... 다고 쓰고 혹시나 해서 알라딘 온라인 중고를 검색해봤더니, 어라, 있다. 나는 이거 일본까지 가서 구했는데. X Japan 발라드 컬렉션 사러 갔다가 없어서 홧김에 지른 앨범이었다. 쿠와타 케이스케의 솔로 신인 시절과 쿠와타 밴드 때 히트곡들이 들어있어서 앨범 구성이 알차다. 허름해 보이는 외관과 다르다. 버릴 곡이 없다.



    

막상 다 써놓고 보니, 자랑의 임팩트가 부족하다. 레어템이라고 자부하던 것들이 생각만큼 레어하지 않았을 줄이야. 역시 자랑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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