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4일을 잊을 수 없다. 브런치 알림을 통해 온 메일 한 통. 난 눈을 의심했다.
사실 처음에는 안 믿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서. 여기서 말하는 출간이 내가 아는 그 출간과는 다르겠지? 바보 같지만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가장 먼저 “메일에서 말씀하신 출간이 내가 아는 그 출간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그렇다고 하는데도 믿지 못했다. 아마 여러 명이 챕터를 나눠서 같이 쓰자는 그런 얘기겠지. 밑져야 본전이니 만나나 보자. 그러고 서울까지 갔다. 에디터 선생님은 나보고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대로 써보라고 하셨다.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중 하나다.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심장이 너무 쿵쿵 뛰어서 주위에서 항의할까봐 걱정될 정도였다. 대학에 붙었을 때보다, 전역했을 때보다, 석사논문이 통과됐을 때보다, 취업했을 때보다, 이직했을 때보다, 비교도 안 되게 더 기뻤다.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당장 이번 주 로또 1등에 당첨된대도 그때보다 더 흥분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기쁨과 흥분은 순간이었다. 브런치에도 몇 번 썼지만, 책을 쓴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된 일이었다. 회사일, 집안일, 육아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다 쏟아붓는데도 그랬다. 작업 시작 이후 회식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사교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 좋아하던 플스도 끊었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가며 목차를 짜고 방향을 정하고 원고를 쓰고는 있다. 하지만 매일매일 불안과 고민이 엄습한다. 이거 맞게 쓰는 건가? 서사가 꼬이지는 않는가? 사실관계가 틀린 곳은 없을까? 이런 이야기를 @세온 작가님 말고 재밌게 읽을 사람이 또 있을까?
힘겹게 쓴 원고들은 중간 점검 차원에서 브런치에도 올린다. 마음씨 따뜻한 이웃 작가님들이 격려 겸 좋은 말씀을 해주신다. 그 말씀들 하나하나에 정말 큰 용기를 얻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은 끝내 떨치지 못한다. 얼마 전에는 악몽도 꾸었다. 꿈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저히 이걸로는 안 되겠으니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평생 가위에 눌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깼다. 깨자마자 정신 차리고 쓰던 원고를 이어서 썼다. 요즘의 나의 일상이 이렇다.
그리고 며칠 전, 회사 계정으로 메일을 받았다. 요즘 상위 부처에서 보안 점검 차 낚시로 보내는 메일이 많다. 그건 줄 알고 지울 뻔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 출판사 대표님께서 보낸 메일이었다. 내 브런치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소개 글을 잘 봤다며, 출간을 상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두 통이 연달아 와 있었다. 장문의 메일을 통해 이분이 내 글을 여러 편 읽고, 나에 대해 많이 알아보셨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출간 준비 중인 것도 안다며, 어차피 글은 계속 쓸 거니 한번 만나자고 하셨다.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번에는 의심이 들지 않았다. 출간 제의가 분명했다. 다만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지금 하는 작업도 너무 벅차고 막막한데, 새로운 일을 또 벌여도 될까. 이걸 수락하면 먼저 제의한 출판사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반면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이번 제의는 내 전공 분야 – 과학기술정책 - 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먼저 계약한 출판사는 이미 기획 방향이 뚜렷했다. 내가 잘 아는 분야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기획안을 쓰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내용을 일부 포함시켰다. 그러나 출판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어서 까였다. 결과적으로 잘 모르는 내용이 주축이 되었다.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어떻게 얻은 출간 기회인데, 공부해서 돌파하자는 생각으로 그냥 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번 제의는 먼저 출판사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빠진 그 내용을 정확히 담고 있었다. 이런 우연도 있을 수 있나.
결국 만날 약속을 했다. 요즘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데 다행히 대표님이 대전까지 와주셨다. 만나러 가면서도 고민이 되었다.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어마어마한 목차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 이거 다 쓸 수 있어? 이참에 회사를 그만둬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내의 등짝 스매싱이 겁나 생각을 거두었다. 그래, 회사는 내 운명인데 다녀야지 어쩌겠나. 친한 형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했다. 어쩌면 좋겠냐고. 형은 어이없어했다. 남들은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한다고 야단인데, 넌 가만히 있는데도 제의가 오는데 그걸 왜 고민하냐고 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만남은 예상외였다. 대화가 너무 잘 통해서. 문과 출신임에 분명한 대표님은 해박한 과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기획의 요지는 ‘과학연구가 이루어지는 방법’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방법은 연역법이나 귀납법 같은 방법론이 아니다. 현실사회(또는 정치)에서 연구가 어떻게 조직되고, 자원은 어떻게 동원되며, 그 결과는 어떻게 퍼져나가는가를 의미했다. 이 거시적 방법들을 몇 가지로 유형화해, 그에 맞는 조직들(연구소, 재단, 국제기구, 기업 등)을 배치하고 캐릭터와 서사들을 부여하자는 아이디어였다. 당연히 과학 발전의 역사적, 정책적 맥락이 기획의 중심이 된다. 잘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한참을 신나서 떠들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결국 나도 모르게(?) 대표님과 의기투합해버렸다. 그나마 다행은 출간 준비 중인 내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주셨다는 것이다. 모든 작업은 지금 하는 일이 끝난 후에 시작하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그저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구체화하기로 했다. 대표님은 내가 이 바닥에서 10년 이상 지지고 볶은 실무자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교수님들이나 대학원생들은 이론적으로야 더 뛰어나겠지만 글에 현장감이 없다고 했다. 반면 내 글에는 현장의 고민과 경험이 녹아 있는 게 가장 눈에 띄었다고 했다. 내 글을 그렇게 열심히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니 새삼 감격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 대표님께 간단히 인사의 문자를 보냈다.
집에 돌아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본다. 지금의 기분이 가라앉기 전에 글로 남기고 싶어서 주절주절 써본다. 처음 출간이 확정되었을 때는 그저 흥분만 되었었다. 이번에는 그렇지는 않다. 당장 써야 할 원고 걱정이 태산이다. 하지만 마음속 저 먼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조금씩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그것을 반갑게 느끼며 음악을 켠다. 며칠 전 올렸던, 비오는 날의 플레이리스트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탈락시킨 곡이다. 에픽하이의 <빈차>. 오늘 밤은 늦게까지 잠 못 이룰 것 같다.
내가 해야 할 일
벌어야 할 돈 말고도 뭐가 있었는데
내가 가야 할 길
나에게도 꿈같은 게 뭐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꿈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