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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Aug 18. 2023

시험의 추억

* 이 글은 @세온 작가님의 2023년 8월 15일 글 '드래곤 볼이 취직에 끼친 영향'에서 영감을 받아 썼습니다.


어릴 때부터 시험에 약했다.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시험에는 행운도 꽤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많이 치르다 보면 운 좋게 실력보다 점수가 잘 나올 때도 있다. 나는 그런 적이 거의 없었다. 잘해봐야 딱 실력만큼 점수가 나왔다. 못하면 아는 문제도 틀려서 점수가 땅을 파고 들어갔고. 시험이 체질에 맞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유독 나와는 안 맞는다고 느껴왔다. 그래서 시험으로 입신양명하겠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접었다. 고시, 공무원 시험, 전문직 시험 등은 쳐다도 안 봤다. 그리고 최소한의 시험만 치르면서 살아왔다. 정말 거부하면 인생이 뒤틀리는 그런 시험들. 예컨대 중간·기말고사, 연합고사, 수능, 입사시험 등등. 대학입시 때도 논술 시험이 싫어서, 100% 수능점수로만 뽑는 학교의 특차전형에 지원했다. 

    

그런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시험이 있다. 대학원 때 봤던 논문자격시험이다. 이름은 거창해 보이지만 별거 아니다. 필수 학점을 다 이수하고, 학위논문을 쓰기 전에 치르는 시험이다. 말 그대로 자격시험이라 일정 기준만 통과하면 된다. 내가 다닌 대학원 사회학과의 논문자격시험 과목은 2개였다. 이론과 방법론. 두 과목에서 과락만 면하면 합격이었다. 사실 합격이 영광스러운 게 아니라, 불합격이 수치인 시험이었다. 떨어지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론 시험은 마지막 학기 전공필수였던 사회학특수연구 과목의 기말고사로 대체되었다. 이건 일종의 옴니버스 수업이었다. 네 명의 교수님이 돌아가면서 자기 전공을 주제로 강의했다. 대학원 수업이 대부분 그렇듯, 매주 특정 주제에 대한 발표 세미나로 진행되었다. 방법론 시험은 역시 전공필수였던 양적연구방법론 과목의 기말고사가 대신했다. 양적연구방법론이란 한 마디로 통계다. 다양한 사회현상의 연구에 적합한 통계 모델을 디자인하는 것이 핵심인 과목이었다.

     

시험이 다가오자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합격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전공을 바꿨다. 그래서 석사과정에서 사회학을 처음 배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학부에서부터 사회학을 전공하고 온 친구들과는 차이가 났다. 그 때문에 좌절도 많이 했다. 일단 영어 원서 읽는 것부터 너무 힘들었다. 베버니 뒤르켐이니 짐멜이니 헤겔이니 하는 학자들, 우리말로도 뭔 소리인지 모를 판에 영어로 읽으라니 말이 되는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 있다. 첫 학기 교재 중 하나였다. 그래도 그 교수님은 영어 원서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나는 당연히 번역본으로 읽었다. 그런데도 정말 한 단락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장 좀 보태서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자인 수준이었다. 읽다가 포기한 나는 결국 꼼수를 썼다. 헤겔의 저서를 쉽게 해설한 논문들을 구해다 읽은 것이다. 교수님이 알면 야매짓이라며 분노할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걸 여러 편 읽으니 비로소 감이 좀 잡히는 듯했다.

     

그래도 그나마 이론은 나았다. 방법론이야말로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포자 외길 인생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수포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노력은 엄청나게 했기 때문이다. 초중고 12년간 내가 한 수험 공부의 총량에서 80%는 수학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늘 점수가 나빴다. 수능에서는 총 실점의 70%가 수학이었다. 그런 내가 통계를 이해할 리가 없었다. 한 학기 내내 열심히 수업을 들었지만,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마침내 시험 일정과 방법이 발표되었다. 우선 사회학특수연구. 학과장 교수님이 희한한 제안을 했다. 무제한 시험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즉 답안 분량과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을 테니, 쓰고 싶은 만큼 써내라는 이야기였다. 대체 문제를 얼마나 기괴하게 내려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양적연구방법론은 시험이 아니라 조별 과제였다. 각자 탐구하려는 사회문제를 설정하고, 그에 부합하는 통계 모델을 만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철저히 전략적으로 시험에 임하기로 했다. 어차피 실력대로 정면승부하면 떨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최대한 치사한 방법으로 시험을 봐서 과락만은 면하겠다는 게 전략의 핵심이었다. 

    

사회학특수연구는 방대한 분량이 문제였다. 넷이나 되는 교수님들이 각자 쟁점과 이론을 나열하며 개괄식으로 강의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학이론 대부분이 시험 범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걸 다 공부할 수는 없었다. 나는 교수님들의 최근 연구실적들을 검색해보았다. 논문, 학회발표, 기고문, 언론 인터뷰까지 뒤졌다. 그걸 키워드별로 분류해보니 어느 정도 이분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흐름이 잡혔다. 그리고 그것에 맞는 이론과 학자들의 저서를 찾았다. 여기서 첫 학기 때 써먹었던 꼼수가 빛을 발했다. 원전보다는 해설 논문 위주로, 깊이는 얕지만 범위는 넓게 쟁점들을 일람해 나갔다.

     

양적연구방법론은 뭐 방법이 없었다. 그냥 버스를 타기로 했다. 즉 잘하는 사람들과 한 조가 되어 묻어가기로 한 것이다. 친하게 지내던 두 명의 동기가 딱 적임이었다. 한 명은 취미가 수학 문제 풀기인 공대 출신 형이었다. 다른 한 명은 어렵기로 악명 높았던 초창기 수능에서 수학 만점을 받은 의대 출신 누나였다. 둘 다 수학의 굇수들이었다. 이들과 한 조가 된다는 것은 월드컵에서 메시-호날두와 한 팀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서 결국 두 명을 끌어들였다.

     

사회학특수연구 시험 날 아침이 밝았다. 네 명의 교수님이 3문제씩 출제했고, 그중 2문제씩 골라서 풀면 되었다. 그러니까 총 8문제를 풀어야 했다. 문제들을 확인한 나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예상했던 쟁점들이 대부분 그대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특히 모 교수님의 문제에서 전율이 일었다. 유럽의 비판사회이론을 전공한 노교수님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말년에 동양사상에 꽂히셔서 중국에 교환교수도 다녀오고 뭐 그러셨다. 그 동양사상에 대한 문제가 떡하니 나온 것이다. 아마 다른 학생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지나가는 말처럼 사회학도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몇 번 강조하셨을 뿐이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일사천리로 답을 써 내려갔다. 어차피 시간제한도 없겠다,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내용은 다 가져다 썼다. 나중에는 손이 아파서 답을 쓸 수가 없었다. 아침 9시에 시작한 시험은 점심시간도 없이 계속되었다. 다른 학생들도 준비를 많이 했는지, 오후가 되도록 한 명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오후 5시에 첫 번째 제출자가 나왔다. 그때부터 학생들이 줄줄이 답안지를 제출했다. 나는 6시쯤 냈다. 오후 7시가 넘어서야 최후의 1인(무슨 골든벨도 아니고)이 답안지를 냈다. 이 불타는 학구열에 감명받은 학과장 교수님은 모두 너무 수고했다며, 저녁으로 피자를 쐈다.

     

양적연구방법론 조별 과제에서는 내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을 하지. 그래서 머리 쓰는 일은 두 브레인에게 전담시키고, 몸 쓰는 일 전부를 내가 맡았다. 자료조사, 페이퍼 타이핑, PPT 제작, 그리고 커피와 담배 심부름까지. 그렇게 나온 결과를 보니 정말 그럴듯해 보였다. 나는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며 감격했다.

     

사회학특수연구 시험 결과가 나왔다. 어느 날 조교실에서 불러서 갔더니, 세상에!! 대학원 담당 조교 누나가 내가 1등이라고 했다. 살면서 치렀던 그 어떤 시험 결과보다 충격적이면서 기뻤다. 사실 자격시험이라서 등수 같은 건 산출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그런데 굳이 1등이라고 한 건, 채점을 총괄한 교수님이 내 이름을 보고 얘 누구냐며 조교실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처음 보는 이름(한 학기 내내 수업 들었는데;;)인데 똑똑하다며, 학과에서 운영하는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쓰고 싶다고 하셨다고 했다. 당시 나는 논술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고 있어서 그 제안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깐깐한 교수님이 칭찬해주셨다니, 고생한 보상을 제대로 받는 느낌이었다.

     

이제 양적연구방법론 차례였다. 과제 발표하는 날이 되었다. 수학 굇수 공대 형이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발표를 진행했다. 그 형은 과거 운동권에서 한 이빨했던 이론가 출신이어서, 말빨도 참 좋았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지켜보고 있던 교수님(피자 쐈던 그 학과장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발표가 끝났다. 약 30초의 정적이 흘렀다. 이어 나온 교수님의 평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조는... 너무 boring해서(지루해서) 뭐 평가할 게 없네. 문제 제기도 평범하고 논리도 이상하고... 하여튼 뭐, 자 다음 조 해봐.” 그리고 결과는 과락이었다. 메시-호날두와 한 팀으로 월드컵에 나가서 조별 예선 탈락한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졸업이 한 학기 미뤄져야 했다(당연하지 논문을 못 쓰는데ㅜㅜ). 과락한 조는 우리밖에 없었다. 그날 밤 우리 조는 심각하게 비상 대책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아주 과감한 결론을 도출했다. 교수님께 가서 읍소하기로. 만화 <슬램덩크>에 보면, 전국대회 예선을 통과한 북산의 스타팅 멤버가 모조리 시험에 낙제하는 바람에 대회에 못 나갈 뻔하는 상황이 있다. 그래서 채치수를 필두로 한 농구부원들이 교무실로 가서 재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우리 조가 딱 그 꼴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겨우 재시험을 보았고, 천신만고 끝에 과락을 면했다.

     

글이 의도와 달리 너무 길어졌는데... 일단 여기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긴 글을 다 읽으신 분들은 왜 내가 그 별것 아닌 논문자격시험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는지 이해하실 것이다. 달랑 두 과목 보는데 1등과 꼴등을 동시에 한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으려나. 여전히 나는 내가 시험과 안 맞는다고 느낀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또다시 시험 볼 일이 없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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