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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27. 2023

전쟁의 판도를 바꾼 약

페니실린과 제2차 세계대전

1944년 6월 6일 아침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해안선을 돌파하려는 군인들과 저지하려는 군인들의 대혈투가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 영국, 캐나다 연합군 15만 명이 투입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상륙 작전이었다. 이들은 80㎞가 넘는 해안선을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유럽 대륙 진입을 시도했다. 역사학자 존 키건(John Keegan)의 묘사다.

     

노르망디 해안의 바다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바다 쪽 수평선까지 문자 그대로 수천 척의 배로 가득 들어찼다. 하늘은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로 요란했다. 포격이 쏟아지면서 연기와 먼지가 피어올라 해안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이 험악한 구름 아래서 영국군과 캐나다군과 미군의 보병이 양륙정에서 내려 해안 장애물 사이로 길을 트고 적군의 사격을 피할 엄폐물을 찾아 몸을 던져 뛰어들고 해변 윗부분에 있는 사면과 둔덕의 차폐물에 닿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상륙 작전은 시도하는 쪽의 피해가 더 큰 법.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은 독일군 정예부대가 지키던 오마하 해변이었다. 이곳에 투입된 미군은 상륙정의 문이 열리자마자 분당 1,200발로 쏟아지는 MG42의 공세부터 받아내야 했다. ‘히틀러의 전기톱’으로 불린 이 기관총은 연합군을 가장 많이 죽인 무기로 전쟁 내내 악명이 높았다. 여기에 수중지뢰, 대전차포, 후방의 곡사포까지 가세하며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곳에서 희생된 미군만 3,000명이 넘는다. 1998년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바로 이 전투를 묘사했다. 피가 난무하고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장기가 튀어나오는 광경을 무심히 훑는 사실적 연출이 압권이다. 어쨌든 연합군은 이 작전의 성공으로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물론 그 이전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게 더 결정적이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해변 상륙 장면. 어찌나 리얼하게 찍었는지, 영화를 본 참전용사들이 PTSD에 걸릴 정도였다.

     

전투보다 감염으로 죽는 병사들

     

연합국의 승리 요인으로 페니실린(Penicillin)을 빼놓을 수 없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이 약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부터 대량 사용되어 강력한 효과를 입증했다. 물론 약의 원리 자체는 과학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였다면 이 약이 그렇게 빠르고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페니실린의 상용화에는 과학 못지않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전장에 공급된 페니실린은 수많은 부상 병사를 살려 전력 강화에 공헌했다. 페니실린을 원자폭탄, 레이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기술적 요인으로 꼽는 이유다.


그때까지 병사들은 전투 못지않게 감염에 의한 사망 비율이 높았다. 19세기 중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이 명성을 떨친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당시에는 전장의 비위생적 환경으로 인해 작은 부상이 더 큰 감염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크림전쟁에 투입된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문제를 꿰뚫어 보고 보건위생을 개선하여 부상자의 감염을 예방했다. 간호 활동은 물론 전면적인 위생 개선 필요성을 정부에 탄원하여 상당한 지원을 받아냈다. 전장에 위생의 중요성을 확립한 것은 나이팅게일이 최초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이후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눈에 띄게 급감했다.


다만 감염 예방 이상으로 중요한 치료약은 별 진전이 없었다. 19세기말에는 이미 세균학이 새로운 과학 분야로 부상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작은 세균에 의해 질병들이 생겨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장 폴 뷔예맹(Jean Paul Vuillemin)은 아주 중요한 발견을 했다. 곰팡이와 박테리아, 또는 박테리아끼리는 서로의 목숨에 대항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항생(antibiosis), 말 그대로 ‘생명에 대항하는’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20세기 들어서는 이러한 작용을 기반으로 세균 증식을 억제하려는 항생제의 개발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인류에게 해로운 것들을 서로 싸움 붙여 퇴치한다는 발상이니, 한 마디로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최초의 유의미한 성과는 보통 설파제라고 불리는 설파닐아미드(sulfanilamide)였다. 1932년 독일의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Domagk)가 붉은색 염료를 만드는 데 쓰던 프론토실(prontosil)의 화학적 조성을 바꿔서 만들었다. 그 과정이 극적이다. 어느 날 도마크의 딸이 오염된 바늘에 찔려서 염증이 온 팔에 퍼지고 말았다. 의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잘라낼 것을 권했다. 바늘에 찔린 것 가지고 뭔 팔까지 자르냐고? 당시만 해도 온몸에 세균이 퍼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신체 부위를 떼어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때 도마크는 자신이 개발한 프론토실을 복용시켜 염증을 없앨 수 있었다.


설파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쓰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제2차 세계대전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총상을 입은 군인이 나동그라져 “Medic~!!”을 외치면, 의무병이 후다닥 달려와 “Easy, easy, man, You can live!”하면서 허리춤에서 뭔 하얀 가루를 꺼내 뿌리는 장면. 그 하얀 가루가 설파제다. 당시 의무병은 설파제를 상시 휴대했고, 개방 상처에 즉시 처방해 감염을 막도록 교육받았다.

“Easy, easy, man, You can live!”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설파제 처방 장면.



     

우연과 행운의 대발견

     

페니실린은 설파제보다 발견은 빨랐으나 상용화가 훨씬 늦었다. 과학사에서는 우연한 발견이 인류의 진보로 이어진 경우가 의외로 많다. 페니실린은 그중에서도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포도상구균을 배양하다가 말 그대로 얻어걸렸다. 포도상구균은 주로 피부에서 암약하는 세균이다. 평상시에는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나, 외상으로 감염에 노출되면 본색을 드러낸다. 인체의 1차 방어선인 피부를 피해 체내로 쉽게 침투하는 특성 때문에 치명적이다.

 

1928년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도 유행성 독감 연구를 위해 실험용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있었다. 여름휴가를 다녀온 플레밍은 유독 하나의 배양 접시에만 균이 죽어 있는 걸 발견했다. 접시가 오염되었나? 자세히 살펴보니 접시에 웬 곰팡이들이 있었다. 이유는 곧 밝혀졌다. 2층의 천식 알레르기 연구실에서 푸른곰팡이(penicillium notatum) 홀씨가 3층의 플레밍 연구실로 날아온 것이다. 플레밍은 푸른곰팡이만 분리해서 배양해 보았다. 그리고 빵에 곧잘 생기는 이 푸른곰팡이가 강력한 항균성이 있음을 알아냈다. 엄청난 행운이었다. 본래 플레밍은 동료들 사이에서 지저분하기로 유명했다. 그게 오히려 연구에 도움을 준 셈이다. 푸른곰팡이 홀씨도 휴가를 가느라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뚜껑이 열린 배양 접시에 앉은 것이었다. 물론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실패한 결과에서도 원인을 복기해 보려는 플레밍의 치밀함이 있었기에 행운도 따라올 수 있었다.


플레밍은 이러한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푸른곰팡이에서 고순도의 항생물질, 즉 페니실린만 뽑아내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추출이 잘되지 않았다. 미생물학자였던 그에게 화학적 정제 기술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도마크의 설파제가 등장해 각광받았다. 결국 플레밍은 페니실린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감염 치료제보다는 소독제로서 쓸만하겠다는 생각으로 연구를 마무리했다. 몇몇 학자들이 추출을 시도해 보았지만 다들 실패했다. 획기적 발견인 줄 알았던 페니실린은 그렇게 잊혀지고 있었다.


10년 뒤 전혀 다른 연구자들이 페니실린을 부활시켰다.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온 유대인 언스트 체인(Ernst Chain)과 그의 동료 하워드 플로리(Howard Florey)였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였던 둘은 가능성에 비해 진전이 없던 페니실린을 새 프로젝트로 채택했다. 여기에는 정부 연구비를 받아내 연구소의 재정난을 해결해 보려는 계산도 있었다. 연구팀에는 곰팡이 배양 전문가 노먼 히틀리(Norman Heatley)도 합류했다. 다만 영국 정부도 사정이 좋지 않아서 자금을 지원해주지 못했다. 대신 미국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를 받을 수 있었다.


연구는 험난했다. 실험을 거듭할수록 페니실린의 변덕스러움만 드러났다. 워낙 소량만 분비되는 까닭에 푸른곰팡이를 엄청나게 많이 키워야 했다. 또한 화학적으로 불안정해서 며칠만 지나도 항균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1년 반 동안 수많은 연구진이 달라붙어 얻어낸 페니실린은 달랑 0.1g이었다. 그래도 쥐 실험에서 드러난 그 0.1g의 항균성은 아주 강력했다. 인체에도 무해했다.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혁명이 될만한 약임에는 분명했다.



     

전쟁과 맞물린 대량생산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변수가 되었다. 체인과 플로리가 0.1g의 페니실린을 겨우 얻어낸 1940년, 서유럽은 대부분 독일에 점령당했다. 런던도 사정권에 들어왔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대량생산은 요원했다. 한 사람을 치료하려면 페니실린 분말이 30g은 필요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연구소를 풀로 돌려도 1주일에 3g밖에 못 만들었다. 영국 제약회사들도 전시 상황이라 여력이 없었다. 부상자가 속출했으나 설파제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플로리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페니실린이 질병뿐만 아니라 독일과의 전쟁에도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언제 폭격당할지 모를 영국에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하다는 것.


1941년 플로리와 히틀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정부든 제약회사든 설득해서 어떻게든 대량생산을 해볼 요량이었다. 이 선택은 그대로 적중했다. 우선 미국 농무부의 노던 리저널 연구소와 협업해 옥수수 찌꺼기를 배양물질로 써서 생산량을 6배 늘렸다. 이 연구소가 미국 중서부의 넘쳐나는 옥수수를 산업에 응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습당한 미국이 마침내 참전을 결정했다. 선전포고 5일 뒤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은 페니실린의 긴급 생산 계획을 입안했다. 미국 농무부, 영국의 연구자들, 그리고 머크(Merck & Co.)와 화이자(Pfizer) 등 제약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량생산은 어려웠다. 1942년 6월까지 미국의 전체 생산량은 겨우 환자 10명분에 불과했다. 너무 귀해서 임상시험 환자의 오줌을 걸러 페니실린을 다시 회수할 정도였다.

미국 농무부의 페니실린 연구팀 모습. 페니실린 대량생산은 다양한 조직과 주체들이 협력한 집단연구의 성과였다.


1942년 가을 화이자에서 묘안이 나왔다. 지금이야 화이자가 굴지의 제약회사지만, 원래는 싸구려 레몬을 수입해 콜라에 넣는 구연산을 추출하던 업체였다. 1919년 화이자는 설탕을 곰팡이로 발효시켜서 구연산 제조 원가를 1/6로 낮춘 이력이 있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엔지니어 재스퍼 케인(Jasper Kane)은 크고 깊은 발효조를 사용하는 딥탱크(Deep Tank) 발효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은 구연산보다 의약품 원료에 더 적합했다. 덕분에 화이자는 제약회사로 변신했고, 페니실린 컨소시엄에도 참여했다. 화이자도 처음에는 과학자들에게 배운 대로 소형 플라스크를 써서 푸른곰팡이를 배양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걸로 대량생산은 택도 없었다.


케인은 딥탱크 발효법을 페니실린에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도박이었다. 성공을 장담하기도 어렵지만, 핵심 생산라인을 그렇게 몰빵하면 다른 제품에 타격을 줄 것이 뻔했다. 화이자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이 문제를 두고 장고했다. 결국 이사회 표결 끝에 케인에게 개발을 맡겼다.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1944년 3월 브루클린의 옛 얼음공장에서 페니실린 생산이 시작됐다. 계획의 5배가 넘는 생산량이 쏟아졌다. 미국 정부는 화이자의 동의를 얻어 이 제조법을 19개 회사에 공유하고, 지원 물품과 자금을 마구 살포했다. 페니실린이 전략 물자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옥스퍼드 연구소의 페니실린 생산량은 푸른곰팡이 1㎥당 1~2 단위에 그쳤다. 이것이 1944년 상반기 6,840억 단위, 1945년에는 7조 5,000억 단위까지 치솟았다. 말 그대로 ‘천조국’ 미국의 위엄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90%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페니실린은 폐렴, 패혈증에 의한 사망과 부상으로 인한 사지 절단을 현격히 줄였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약 12~15%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44년 브루클린에서 가동된 화이자의 페니실린 생산 플랜트를 그린 삽화.



     

국가와 과학의 파트너십

     

페니실린의 위력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일단 전쟁 중의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져 누구나 쉽게 구하는 약이 되었다. 1943년 OSRD는 페니실린의 자연 추출을 넘어 인공 합성하는 연구도 추진했다. 14년 뒤 마침내 합성법이 개발되었고, 페니실린은 제2 전성기를 맞았다. 범용약물로 여러 증상에 맞는 변형체들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매독, 임질, 결핵, 폐렴, 괴저 등 답이 없던 질병들이 페니실린으로 극복되었다. 페니실린이 구한 생명은 1942년 이후 2억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약이 이렇게 많은 생명을 구한 사례는 없었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인류는 질병에 일방적으로 당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감염은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속수무책의 적이었다.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면 신체 일부를 잘라내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현대의 약국에서 파는 연고만 있어도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게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상이었다. 페니실린을 필두로 한 다양한 항생제의 등장은 이러한 참사를 차단하고 인류의 수명을 크게 늘렸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질병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플레밍, 체인, 플로리는 페니실린 개발 공로로 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상용화 2년 만의 이례적으로 빠른 수상이었다.


과학사적으로도 페니실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니실린으로 거대과학(big science)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페니실린 개발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다양하다. 예컨대 플레밍은 과학적 발견에 천착한 과학자였고, 히틀리는 정제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였으며, 케인은 대량생산을 조직한 기업가였다. 이렇듯 페니실린은 정부, 기업, 재단, 대학 등을 망라하는 집단작업의 결과였다. 또한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서 국가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페니실린 대량생산의 결정적 순간은 미국 정부가 화이자의 제조법을 (특허 따위는 무시하면서) 공유하고, 엄청난 자금과 자재를 지원한 데에 있었다. 이는 과학 발전이 국가 규모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함의한다. 이후 맨해튼 계획, 아폴로 계획 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만큼 과학과 국가는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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