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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05. 2023

예측을 빗나간 디스토피아

온실효과와 기후변화의 과학

달빛에도 열이 있을까? 똑같은 빛이지만 달빛은 햇빛처럼 따뜻하지 않다. 오히려 서늘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달빛은 오랫동안 ‘차가운 빛’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17세기 베이컨은 달빛을 빛의 부정적 사례로 꼽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 의문을 품고 실험해 본 사람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마케도니오 멜로니(Macedonio Melloni)다. 1846년 그는 실험을 위해 여러 개의 열전대(thermocouple)를 연결한 특수 온도계를 제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커다란 렌즈에 달빛을 모아 측정해 보았다. 놀랍게도 열이 있었다. 너무나 약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이러한 통찰은 복사열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발견이었다.


영국의 존 틴들(John Tyndall)도 멜로니와 교류하며 복사열을 연구했다. 특히 기체 내 가스들의 열 흡수 정도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1856년 기체의 적외선 흡수 정도를 측정하는 기구를 직접 만들어 실험해 보았다. 이때 멜로니의 온도계가 중요한 힌트가 되었다. 산소, 질소, 수소의 흡수 정도는 별 차이 없었다. 그런데 이산화탄소와 수증기를 포함한 기체가 유독 적외선을 잘 흡수했다. 공기의 0.04%만 차지하는 이산화탄소가 이런 효과를 발휘하는 이유는 분자구조에 있었다. 이산화탄소 분자는 크고 복잡해서 질소나 산소보다 훨씬 다양하게 운동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틴들은 이를 토대로 대기 중의 이 가스들이 육지의 복사열(적외선)을 계속 빼앗으면 날씨가 변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곧 온실효과(Greenhouse effect)의 발견이다.

온실효과 발견에 기여한 틴들의 적외선 흡수 실험 장치



     

온실효과의 발견과 낙관

     

온실효과를 예상한 사람은 과거에도 있었다.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Jean-Baptiste Joseph Fourier)다. 1822년 푸리에는 지구가 태양열을 계속 흡수하는데도 온도가 일정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수학자의 직관으로 가설을 세워 보았다. 지구가 적외선 복사열을 우주로 내보내서 그런 것 아닐까? 그럼 지구는 차가워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대기의 이산화탄소와 수증기가 적외선이 모두 우주로 방출되는 걸 막아서 그렇겠지? 이러한 푸리에의 가설은 실제 온실효과에 아주 근접했다. 틴들의 실험은 이걸 증명한 것이었다.


1896년 스웨덴의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는 온실효과의 메커니즘을 수학으로 산출했다. 이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2배 높아지면 지구 온도는 5~6℃ 상승한다. 지구가 더워지는 현상을 온실에 비유한 것도, 온실가스라는 단어를 쓴 것도 아레니우스가 처음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계산이 매우 정확했다는 것이다. 요즘에야 슈퍼컴퓨터로 기후를 예측한다지만, 19세기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레니우스는 종이와 연필만 써서 이산화탄소 농도와 지구 온도의 상관관계를 밝혔으니 대단한 일이다.


다만 이 연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물론 아레니우스의 주장은 논리적이었으며 그 함의도 충격적이었다. 계산대로라면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도 상승은 최대 21℃에까지 이를 것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의 인식에서 지구의 온도 상승은 너무 먼 얘기였다. 아레니우스 자신부터 그랬다. 지구의 70%를 차지하는 거대한 바다가 증가하는 이산화탄소를 대부분 흡수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마 온실효과가 재앙이 되려면 1,000년은 더 걸릴 것이었다. 1903년 아레니우스는 노벨화학상을 받았지만, 수상 성과는 기후변화와 무관한 전기해리 이론이었다.


온실효과는 심지어 희망으로도 여겨졌다. 19세기가 소빙하기의 공포에서 막 벗어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소빙하기 지구 기온은 평균 2~3℃ 더 낮아진다. 당연히 의식주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중세 말, 근대 초 이어진 소빙하기의 절정은 17세기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역사학에서도 17세기 위기론이 있다는 것이다. 17세기 인류는 극심한 식량 위기를 겪었고, 사망률도 높아졌으며, 전쟁도 잦았다는 것이 골자다. 특히 유럽에서는 반유대주의와 마법에 대한 맹신이 팽배하기도 했다. 이렇게 흉흉했던 사회 분위기는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온난한 기후는 걱정보다는 바람의 대상이었다. 마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고 벨 에포크가 도래하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높아졌다. 지금이야 따뜻해지는 기후가 부정적 뉘앙스를 띠지만, 당시에는 안락함과 풍요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피터르 브뤼헐의 1565년 작 <눈 속의 사냥꾼>. 소빙하기의 일상을 묘사했다.



     

계속되는 논쟁

     

1938년 이러한 낙관에 찬물을 끼얹는 선구자가 등장했다. 영국의 가이 스튜어트 캘린더(Guy Stewart Callender)다. 그는 인류가 태우는 화석연료가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내뿜으며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온도 상승의 원인을 산업활동에서 찾은 최초의 주장이었다. 캘린더는 증기 엔지니어로서 취미 삼아 기상 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 주장을 일축했다. 화석연료 좀 태운다고 날씨가 바뀐다니, 역시 아마추어답네. 과학자들이 꼭 오만해서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상식으로는 인간의 행위가 거대한 지구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이러한 인류의 영향력은 재고되었다. 전쟁 중 개발된 원자폭탄은 한 국가는 물론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기에도 충분했다. 기후 문제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것은, 기후 연구에 군사기술이 공헌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냉전이 전개되면서 군사기술에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다. 대기와 기상 조건은 전쟁의 필수 고려사항이었기에 기상학 투자도 늘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진전이 이루어졌다.


우선 길버트 플래스(Gilbert Plass)의 이산화탄소 연구다. 1956년 록히드의 열감지 미사일 개발자였던 그는 일과 후 소일거리로 과학 논문을 읽곤 했다. 그러면서 아레니우스의 이론에 흥미를 느껴 새로운 수치를 갓 개발된 디지털 컴퓨터에 넣어 계산해 보았다. 그랬더니 인간이 지구의 평균온도를 한 세기당 1.1℃씩 올릴 수 있다는 놀라운 결론이 나왔다. 사실 이는 변수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모델에 근거해서 설득력은 부족했다. 그러나 적어도 온실효과가 미래의 중요한 문제로 부상할 것이라는 의의는 분명히 보였다. 플래스는 그 미래를 몇 세기 뒤로 잡긴 했지만.


기후 연구에 필수인 방사성 연대 측정법도 군사기술에서 나왔다. 핵실험으로 발생한 방사성 물질의 순환을 측정하는 장비가 그 모체다. 독일에서 원자력을 연구하다 미국으로 망명한 한스 쥐스(Hans Suess)가 최초로 이를 탄소 측정에 적용했다. 1955년 그는 이 분석법으로 대기에 늘어난 탄소가 화석연료의 연소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혔다. 다만 그 양이 많지는 않으니 대부분 바다로 흡수되리라고 예측했다. 미국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로저 르벨(Roger Revelle)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이들은 해양의 이산화탄소 흡수량을 분석, 21세기의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957년 수준일 거라고 예상했다. 이것은 산업화와 인구증가의 속도를 과소평가한 결론이었다. 르벨은 10여 년의 연구를 더 한 뒤에야, 바다가 흡수한 탄소를 보유하지 못하고 재방출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무렵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957년보다 16배나 늘어 있었다.



     

치솟는 킬링 곡선

     

이렇듯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들의 입장은 오락가락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거대한 지구시스템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이론적 예측이 나왔지만, 실제 기후변화를 거시적으로 정밀 측정한 데이터는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일을 해보겠다고 나선 젊은 과학자가 있었다. 미국의 찰스 킬링(Charles Keeling)이다. 킬링은 플래스의 연구에 감명을 받고 직접 찾아가 토론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알려면 맨땅에 헤딩하듯 측정해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러려면 돈이 중요했다. 첨단 관측 장비와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기상학과 지구과학의 국제협력이 확대되면서 관련 연구비도 늘어나고 있었다.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의 르벨과 쥐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양 및 대기 측정 연구비를 확보했다. 킬링도 이 연구팀에 합류해 세계의 이산화탄소 농도 기준을 설정하는 연구과제를 맡았다. 이 돈으로 1958년 정교한 이산화탄소 측정 장비를 제작했다. 이걸 하와이의 마우나로아 화산(해발 3,394m)과 남극에 설치했다. 두 곳은 지구에서도 가장 대기가 깨끗한 곳으로 꼽힌다.


관측해 보니 실제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고 있었다. 킬링은 1960년 남극의 측정치를 근거로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측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 47년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균 연 2ppm씩 증가했다. 이 추이를 기록한 그래프,  즉 킬링 곡선(Keeling Curve)은 그대로 기후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킬링 곡선은 해를 거듭하며 마치 파도처럼, 지수함수적으로 치솟았다. 이는 세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흔히 알고 있는 온난화의 위험, 즉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높아져 도시들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의 위협으로 여겨졌다. 온실효과를 실험으로 입증한 틴들로부터 100년이 넘게 걸려 도달한 결론이었다.

찰스 킬링의 이산화탄소 농도 관측치를 표현한 킬링 곡선. 그 지수함수적인 가파른 모양새는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고, 지구온난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킬링 곡선의 가파른 상승은 과학자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겼다. 이제 기후변화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5년 「사이언스(Science)」에 실린 월러스 브뢰커(Wallace Broecker)의 논문은 기념비적이었다. 이 논문은 1800년부터 지구 온도의 장기 변화를 추적하여, 산업혁명 이후 온실가스 배출이 바다의 탄소 흡수능력을 약화시켰음을 논증한다. 브뢰커는 뛰어난 과학자이면서 번역가이기도 했다. 과학의 논리를 대중의 언어로 쉽게 바꿔 설명했다. 일례로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는 브뢰커가 1975년 논문의 제목으로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브뢰커는 의회나 언론에 나가서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온난화를 칵테일 마시는 시간의 호기심 거리로 여긴다며, 기후라는 변덕스러운 야수가 인간을 파국으로 몰 것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정치로의 확산

    

1980년대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시대였다. 브뢰커의 예언처럼 이상 기후 현상이 인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988년 여름이 그 절정이었다. 혹서, 가뭄, 산불, 슈퍼허리케인이 미국 전역을 덮쳤다. 미국 항공우주국의 제임스 핸슨(James Hansen)은 바로 이 타이밍에 상원에서 열린 청문회에 출석했다. 관측 역사상 최고 온도를 기록한 6월 23일, 그는 지구온난화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에 의한 결과이며 향후 계속될 확률이 99%라고 확언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는 핸슨의 증언을 1면으로 대서특필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산성비, 오존층 파괴, 대기오염 등의 보도가 크게 늘었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온실효과를 아는 미국인 비율은 1981년 38%였으나, 1989년에는 79%로 급증했다.

1988년 6월 미국 상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제임스 핸슨(위)과 다음 날 뉴욕타임스의 대서특필(아래)


이로써 기후변화가 정치의 중심 의제로 부상했다. 이를 둘러싼 행동은 크게 국내정치와 국제협력의 두 흐름으로 나타났다. 미국 내에서는 후일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부통령이 되는 앨 고어(Al Gore)가 최전선에 섰다. 그는 1966년 하버드대학교 재학 시절 르벨의 강연을 듣고 각성한 환경투사였다. 그리고 1981년 의회 입성과 함께 과학의 의제들을 끌고 들어왔다. 자연히 친기업적이었던 레이건 행정부와는 환경 규제와 예산을 두고 대립하는 관계였다. 고어는 2000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보다 더 득표(그러고도 낙선했다)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정열적인 활동이 그를 정치인보다는 환경운동가로 기억하게 한다. 국제적으로는 1988년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IPCC)가 출범했다. 전 세계의 과학자, 관료, 전문가들로 구성된 IPCC의 주 임무는 인간 활동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 결과 보고서를 발표하고 정책 권고안을 도출하기 때문에 세계 정치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1997년 UN이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를 채택한 이유도 IPCC의 권고 때문이었다.

 

특히 2007년은 고어와 IPCC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해였다. 우선 고어가 제작한 환경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An Inconvenient Truth)>이 흥행했다. 그 기세로 무려 아카데미상까지 받았다. IPCC는 4차 보고서를 내면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인류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르면 “인류 활동으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1974년부터 2004년 사이 70%나 증가”했으며, “1750년 이후 인간 활동의 순효과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이었다. IPCC가 다국적의 과학자와 관료들의 연합체임을 고려하면, 이러한 논조는 급진적으로 보일 만큼 예리한 것이었다. 결국 고어와 IPCC는 이 해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며 기후변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7년 고어와 IPCC의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은 기후변화가 전 인류적 문제임을 공언한 것이기도 했다.



     

과학의 위대함, 그리고 불확실성

     

온실효과에서 비롯된 기후변화 연구의 역사는 여러모로 특징적이다. 그것은 기존의 과학적 발견과 비교해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과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자연에 대한 순수한 탐구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온실효과 발견의 최초 기여자들인 멜로니와 틴들은 어떤 의도나 목적이 있어서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호기심에 충실했을 뿐이다. 멜로니는 달빛이 정말 차가운 빛인지, 틴들은 기체들이 왜 적외선을 달리 흡수하는지를 순수하게 알고 싶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참 한가로운 질문이다. 아마 발코니에 쭈그리고 앉아 달빛을 모으는 멜로니를 그의 어머니가 봤다면, 등짝 스매싱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일 한다고. 그러나 호기심에서 출발한 이 실험들은 결국 인류의 명운이 걸린 발견으로 이어졌다. 비단 온실효과뿐만이 아니다. 과학의 역사에서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가 의도치 않은 대박으로 이어진 경우는 이외에도 많다.


둘째는 과학의 위대함과 불확실성이 모두 드러난다는 점이다. 온실효과는 비교적 최근에 문제가 된 현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흔히 그 발견도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온실효과는 19세기 중반, 즉 다윈의 진화론과 동시대에 발견되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기체 종류에 따라 적외선의 흡수 정도가 다르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지구 온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미래까지 알아냈다. 대단한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뉴턴이 정립한 과학적 결정론이 여기서도 그 위엄을 드러낸다. 하지만 연구가 이어지면서 그 불확실성도 대두되었다. 인류가 온난화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에는 이러한 과학적 불확실성의 이유도 있었다. 전 지구적 시스템을 대상으로 삼는 기후변화 연구는 고려할 변수가 그만큼 많고, 처리해야 할 정보도 무궁무진하다. 일례로 1950년대에 과학자들을 괴롭혔던, 인류가 배출한 이산화탄소를 대양이 얼마나 흡수할 것인지가 그런 문제였다. 르벨과 쥐스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도 이를 오판함으로써 기후변화의 공론화가 그만큼 늦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래의 온도 상승을 평가하려면 과거 온도를 알아야 한다. 이는 직접 측정이 불가능하므로 대리 지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2007년 IPCC의 4차 보고서는 2100년의 지구 온도 예측치 범위를 매우 넓게 설정하고 있다.


인류는 과학의 힘에 기대어 발전해 왔다. 그 위대함은 현재를 규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과학의 확실성과 정확성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대부분 과학의 난제 극복이 최종적인 해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기후변화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이제껏 그래왔듯 과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내재하는 불확실성 역시 깊게 통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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