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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l 17. 2023

제3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들

맨해튼 계획과 원자력의 상용화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높은 시청률은 물론 에미상도 16개나 휩쓴 초인기 작품이다. 역대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드라마로 기네스북까지 올랐다. 시놉시스만 봐도 벌써 재미있다. 주인공 월터 화이트(Walter White)는 화학 교사다. 평범한 중년남이지만 과거 이력이 엄청나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 출신 화학자로 1985년 노벨화학상에 기여했으며, 자신의 특허로 굴지의 대기업도 창업했다. 하지만 인생이 몇 번 꼬이면서 소시민으로서 빠듯하게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암 판정에 막막해진다. 결국 죽기 전 가족들을 위해 유산을 남기고자 마약 제조에 뛰어든다. 화학의 천재인 그는 고순도의 마약을 만들어내 업계를 평정한다. 여기에 가족과의 갈등, 수사기관의 추적, 범죄조직과의 대결 등이 엮이며 서스펜스가 대폭발한다.


이 드라마의 무대가 바로 뉴멕시코주다.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사막 천지의 황량한 지방이다. 화이트는 이곳의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에서 화학물질을 다루다가 암에 걸린 것으로 묘사된다. 뉴멕시코와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곳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의 본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가 바로 이곳의 초대 소장이었다. 약관의 파인만도 여기서 폭탄 제조를 위한 공식을 만들었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도 로스앨러모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요컨대 뉴멕시코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탄생한 고향과도 같다.

역대급 미드 <브레이킹 배드>.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소시민이 마약왕으로 흑화해가는 과정을 엄청난 서스펜스와 함께 보여준다.



     

핵분열의 파괴력

     

원자 내부에 존재하는 힘은 비교적 일찍 알려졌다. 그러나 그 힘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기까지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발명이라기보다 동시대의 여러 사람이 수행한 집단연구의 결과였다. 최초의 비전을 제시한 이는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1905년 6월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3개월 후 이를 보완하는 논문을 냈다. 3페이지에 불과한 이 논문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공식이 들어 있다. E=mc2, 흔히 질량-에너지 등가원리로 불리는 공식이다. 이것의 위대한 점은 빛의 속도를 매개로 에너지와 질량을 서로 연결했다는 데 있다. 이전까지 에너지와 질량은 별개의 물리 개념이었다. c2은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를 제곱한 어마어마한 숫자다. 즉 이것이 곱해지면 아주 작은 질량도 엄청난 에너지를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이 에너지가 원자 속에 갇혀 있다. E=mc2은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변환 ‘가능성’만 보여줄 뿐이다. 어떻게 해야 이것이 원자 밖의 거시 세계로 튀어나올지는 제안자인 아인슈타인조차 몰랐다.


1932년 영국의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이 중성자를 발견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그때까지 알려진 원자 내부의 입자는 전자와 양성자뿐이었다. 이 둘은 원자핵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성질을 갖고 있었다. 전자는 너무 가벼웠고, 양성자는 원자핵과 같은 양전하를 띠어서 서로 밀어내는 척력이 작용했다. 그런데 중성자는 전자보다 무겁고 전기적으로도 중성이었다. 따라서 원자핵 내부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중성자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원자핵으로 들어가는 열쇠였던 셈이다.


이를 간파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는 중성자를 원자핵에 충돌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실험해 보았다. 페르미는 주기율표의 거의 모든 원소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그중 특히 우라늄에 관심을 두었다. 원자번호 끝번인 92의 우라늄은 당시 알려진 원소 중에서 가장 무거웠기 때문이다. 페르미는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원자핵이 이를 흡수한다면, 원자번호 93의 새로운 원소가 탄생할 것이라 예상했다. 실제로 페르미는 우라늄보다 약간 더 무거운 원소를 분리해냈다. 페르미는 자신이 새로운 원소를 창조한 것으로 믿었고, 이 성과로 1938년 노벨물리학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페르미가 겨우 성공시킨 실험의 결과는 93번 원소가 아니었다. 1939년 독일의 오토 한(Otto Hahn),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가 그것의 의미를 정확히 밝혀냈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은 질량이 큰 새로운 원소가 아니라, 원자핵이 쪼개지면서 더 작은 질량의 원소 두 개로 변한 것이었다. 이 현상이 바로 핵분열이다. 원래 핵분열은 생물학 용어로서 세포가 분리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마이트너와 함께 연구한 그의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가 생물학 전공자 친구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프리슈는 원자핵의 분열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이를 그대로 사용했다.

 

원자핵을 쪼갠다는 것이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원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데, 원자핵은 그 수만 분의 1 크기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 안의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력이라는 강한 힘으로 묶여 있다.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지면 중성자 두 개를 버리면서 원래 원자의 질량보다 가벼워진다. 이때 줄어든 질량이 E=mc2에 따라 그대로 에너지로 바뀐다. 마이트너의 계산에 의하면 우라늄 원자핵 1개가 분열할 때 나오는 에너지는 2억 전자볼트에 이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남겨진 중성자들도 더 많은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핵분열의 진정한 무서움은 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연쇄반응에 있다. 인류가 여태껏 가져본 적 없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핵분열은 기하급수적인 연쇄반응으로 이어지며 엄청난 에너지를 내놓는다.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

     

핵분열에서 엄청난 파괴력의 폭탄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는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내다본 이였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간 1933년부터 원자핵 분열을 응용한 폭탄의 등장을 경고해왔다. 그러다 1939년 핵분열이 규명되었고, 그 발견자는 하필 독일인들이었다. 독일은 이미 유럽 곳곳에서 우라늄을 확보하는 중이었다. 히틀러가 먼저 폭탄을 개발한다면 재앙이 될 것이었다. 실라르드는 여름휴가 중이던 아인슈타인을 다짜고짜 찾아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자고 설득했다. 아인슈타인은 당황했으나 우려에는 공감했다. 편지에는 새로운 폭탄은 충분히 가능하며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실라르드가 썼으나 서명은 아인슈타인이 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다.


맨해튼 계획은 흔히 이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좀 다르다. 편지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게 전해진 것은 1939년 10월이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한 달 만이다. 편지를 읽은 루스벨트는 전문가를 모아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하고, 6,000달러의 예산을 편성했다. 실라르드의 걱정에 비하면 한가로운 조치였다. 그만큼 미국 정부에게도 원자폭탄 개발은 과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미국은 유럽에서의 전쟁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영국이 앞서나갔다. 마이트너와 함께 핵분열을 발견한 프리슈는 영국으로 망명해 페르미의 조수였던 루돌프 파이얼스(Rudolf Peierls)와 연구하고 있었다. 둘의 목표는 폭탄 제조에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 규모를 추산하는 것. 자연에서 우라늄은 비교적 흔하다. 암석 1t에서 평균 2g 정도 얻는다. 다만 이 우라늄을 모두 폭탄에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핵분열을 손쉽게 일으키려면 우라늄-235라는 동위원소가 필요했다. 동위원소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른 원소다. 양성자 수(원자번호)가 같아서 화학적 성질은 동일하나, 중성자 수가 다르므로 질량에 차이가 있다. 문제는 우라늄-235의 추출이 극악의 난도를 자랑했다는 것이다. 천연 우라늄을 정제하면 우라늄-238이 99.3%, 우라늄-235는 0.7% 나왔다.


1940년 영국 정부는 프리슈와 파이얼스의 이론 작업을 토대로 비밀리에 모드(MAUD) 위원회를 만들었다. 1941년 이 위원회는 원자폭탄 개발에 11.5㎏의 우라늄-235가 필요하며, 제작 기간은 2년 정도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중요한 단서 하나를 덧붙였다.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 자원도 부족하고 언제 독일이 폭격할지 모를 영국에서는 개발에 한계가 있었다. 모드 위원회는 그때까지의 연구결과를 전부 미국에 넘기면서 동참을 촉구했다. 그해 12월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참전을 결정한 상태였다.

원자폭탄 개발의 계기를 만든 아인슈타인(왼쪽)과 실라르드(오른쪽). 그러나 둘은 원자폭탄이 막상 개발되자 그 가공할 위력에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했다.



     

군대와 과학의 결합

     

1942년 초 우라늄 위원회의 어니스트 로런스(Ernest Lawrence)는 영국의 자료를 보고 원자폭탄이 충분히 가능함을 확신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 콤프턴 등 동료들과 함께 이에 필요한 다섯 가지 기술을 보고서로 작성했다. 로런스는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이라는 입자가속기를 발명하여 193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렇다 할 논문 한 편 없이 노벨상을 받은 인물은 그가 최초였다. 사이클로트론은 자기장과 교류전압을 이용해 가속한 입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 고에너지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리해낸다. 1940년 여기서 아주 중요한 발견이 나왔다. 로런스의 제자 글렌 시보그(Glenn Seaborg)가 94번 원소 플루토늄을 발견한 것이다.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235와 우라늄-238을 분리하다가, 우라늄-238이 예기치 않게 변환된 결과였다. 우라늄-235는 추출이 매우 어려워 원자폭탄 개발의 최대 난점으로 지적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플루토늄은 새로운 돌파구로서 각광받았다. 우라늄-235와 비슷한 효과를 내지만, 임계질량도 적고 핵반응 속도는 훨씬 빨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과학연구도 전쟁 수행 체계의 핵심 부문으로 부상했다. 국가가 직접 연구개발을 기획하고 대규모 자원을 동원했다. 미국은 개전을 앞둔 1941년 대통령 직속 과학연구개발국(OSRD)을 설치했다. 국장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교수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가 맡았다. 부시는 공학자는 물론 행정가로서도 역사에 남을 인물이다. 페니실린, 원자폭탄, 레이더 등 전쟁의 판세를 결정지은 무기들이 모두 그의 지휘로 개발되었다.

 

1942년 6월 로런스 등이 제출한 보고서도 OSRD 검토를 거쳐 대통령 승인을 받았다. 아인슈타인 이래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었던 원자 에너지가 미국의 국책사업으로 입안되는 순간이었다. 이 거대한 계획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보안과 속도였다. 즉 적이 모르게, 최대한 빨리 실전 무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를 과학자라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이끌기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따라서 부시는 과학자가 아닌 육군이 계획을 관리·감독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공병대의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대령이 총책임자로 낙점되었다. 그로브스는 1941년 국방부 신청사를 초스피드로 건설해 이미 전설이 된 장교였다. 지금도 있는, 펜타곤으로 부르는 그 건물 맞다. 그는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공할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목표에 방해가 되면 규정, 절차, 소통 따위는 무시했다. 그러니 조직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원자폭탄 개발에는 또 제격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계획을 가리킬 암호를 정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향기가 풍기는 간지나는 이름들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다 무시하고 맨해튼(공병대 본부가 있던 곳)이라는 무미건조한 이름을 붙였다. 또 6개월 넘게 쌓여 있던 미결 문서들을 하루 만에 결재해버리기도 했다. 일이 안 되면 관련 부서에 찾아가 대통령에게 직보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맨해튼 계획은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과학연구 부문은 오펜하이머가 총괄했다. 이것도 의외의 인선이었다. 맨해튼 계획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집단연구이기도 했다. 페르미, 보어, 로런스, 파인만, 콤프턴, 채드윅 등 노벨상 수상자만 21명에 이른다. 물론 오펜하이머도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였으나, 이들에 비해서는 이름값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큰 그림에 대한 포괄적 이해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외국어 소통, 인문학적 통찰, 조율과 협력의 리더십도 돋보였다. 여러 면에서 상반되는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는 의외로 찰떡 케미를 펼치며 계획을 이끌었다.

1945년 뉴멕시코의 원자폭탄 실험 현장을 둘러보는 오펜하이머(왼쪽)와 그로브스(오른쪽). 둘은 공통점이 별로 없었지만, 맨해튼 계획의 추진에 있어서는 환상의 케미를 보였다.



    

천조국의 위엄

     

이론적 가능성만 있었던 원자 에너지의 현실적 구현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은 육군이 미국과 캐나다 곳곳에 대규모 실험 시설을 짓고, 과학자들이 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반적인 연구소를 만드는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오펜하이머는 집단연구와 보안 유지를 위해 사람이 없는 오지에 인력들을 몰아넣는 방법을 제안했다. 즉 외부와 격리된 실험 단지를 조성하여 각 프로젝트를 집중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동의한 그로브스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적당한 부지를 골랐다. 시카고에서는 페르미의 주도로 핵분열 연쇄반응의 제어 장치, 즉 원자로를 만들고 테스트했다. 오크리지에서는 콤프턴이 폭탄의 재료인 우라늄-235의 대규모 농축 작업을 했다. 버클리에서는 로런스가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을 분리했고, 핸포드에는 플루토늄 추출 시설이 들어섰다. 로스앨러모스는 이를 화룡점정하는 마지막 퍼즐이었다. 오펜하이머가 각 프로젝트를 종합해 폭탄을 설계 및 조립했다. 이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맨해튼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핵물리학 관련 논문이 아예 사라졌다. 또 계획에 동원된 수만 명의 인력 중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원래 살던 주민들은 집 근처에 이런 연구시설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떤 방법이 성공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OSRD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폭탄을 모두 시도하기로 했다. 가장 난제였던 우라늄-235의 분리에는 전자기분리법, 기체확산법, 열확산법의 세 가지 기법이 쓰였다. 효율성만 따졌을 때는 셋 다 실패에 가까웠다. 들이는 자원과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적어서였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만들기로 한 뒤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도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었다. 난다긴다하는 과학자들도 그렇게 조건 없는 대규모 지원을 받으며 연구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계획은 단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1945년 7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에서 테스트에 성공했고, 한 달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방의 폭탄이 떨어졌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다. 3년간 총 13만 명의 인력과 2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결과였다. 2023년 기준 330억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이다. 그러니까 2023년 한국 국방 예산(약 57조 원)의 70% 정도 된다. 이러한 대규모 물량과 천재적 두뇌의 조합은 맨해튼 계획의 성공,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천조국’ 미국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맨해튼 계획의 시설이 있던 지역(위)과 핸포드의 플루토늄 추출 시설(아래). 미국 전역에 아래와 같은 도시급 대형 시설이 여러 개 운영되었다.



     

제3의 불을 얻은 인류

     

그리스 신화에 프로메테우스라는 반항적인 신이 나온다.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류에게 선물함으로써 제우스의 분노를 샀다. 맨해튼 계획의 스토리도 이와 닮았다. 실제로 오펜하이머의 전기를 쓴 칼럼니스트 카이 버드(Kai Bird)는 그를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로 불렀다. 오펜하이머가 자연으로부터 태양의 거대한 불꽃을 얻어냄으로써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주었다는 이유에서다. 어쩌면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모든 과학자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류는 원자폭탄을 통해 원자력이라는 전인미답의 에너지를 상용화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46년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 AEC)를 설치해 맨해튼 계획을 군부에서 민간으로 이관했다. 이에 시카고, 오크리지, 버클리, 로스앨러모스의 시설들은 국립연구소로 전환되었다. 이 국립연구소들은 현재도 미국 에너지부(DoE) 소속으로 에너지 분야 기초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오늘날 인류가 누리는 에너지 기술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왔다.


과학의 성과는 대부분 양면성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자력만큼 이것이 극단적인 경우도 드물다. 흔히 원자력은 ‘제3의 불’로 불린다. 인류 역사에서 불, 전기 다음으로 등장한 에너지원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그 효율은 앞 세대를 훨씬 압도한다. 우라늄 1g이 생산하는 에너지는 석탄 3.2t, 석유 267ℓ, TNT 21t과 비슷하다. 이것이 도입되면서 산업활동이 양적, 질적으로 폭발했다. 따라서 원자력은 현대과학기술문명이 성립하는 토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사고가 한번 일어나면, 주변을 말 그대로 황무지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협이 된다. 원자력의 압도적 경제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체에너지 개발이 모색되는 이유다. 따라서 원자력을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 빗댄다면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위대함과 그에 대한 고마움이다. 둘째는 바로 그 때문에 제우스가 분노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원자력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신의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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