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대웅 Aug 28. 2023

시간, 사건, 감정의 다층성이 만든 서사의 폭발력

크리스토퍼 놀란(2023),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를 봤다. 두 번 봤다. 애 키워본 부모는 알 거다. 1년에 극장 가서 영화 한두 편 보기 쉽지 않다는 걸. 그런데 3시간짜리 영화를 일주일 새 두 번이나 봤다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였다. 참, 글 시작하기 전에 감사 인사부터 해야겠다. 여보 고마워!

     

<오펜하이머>는 다층적인 영화다. 다양한 층위에 배치된 장치들을 복잡하게 오가며 서사가 이어진다. 특히 시간, 사건, 감정의 세 가지 관점에서 그렇다. 관객 입장에서는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에는 감독의 의도가 있다. 현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체현하는 복합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오펜하이머는 어떻게 국민 영웅이 되었고, 왜 그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 쉽사리 답할 수 없는 이 질문이 영화를 관통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순차적이지 않다. 오펜하이머의 삶에서 중요했던 세 시간대가 순방향과 역방향을 반복하며 진행된다.

   

첫째는 1925년에서 1945년. 미국 이론물리학의 신성으로 떠오른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계획을 성공으로 이끈다. 오펜하이머의 명성을 떨친 영광의 시간대다. 괴팅겐대학에서 막스 보른을 사사한 오펜하이머는 칼텍과 UC 버클리의 교수가 되어 양자역학을 가르친다. 그러던 1942년의 어느 날, 원자폭탄을 나치보다 빨리 개발하라는 맨해튼 계획을 뢰받는다. 의외의 인선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사회주의 경력이 있는 데다, 노벨상 수상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옆 연구실의 어니스트 로런스는 3년 전에 받았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는 그의 핸디캡을 모두 알면서도 중책을 맡겼다. 그로브스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거대 프로젝트에 필요한 조직과 인재들의 관리에 신들린 능력을 보였다. 결국 임무를 성공시키며 국민 영웅이 되었다.

     

둘째는 1954년.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갱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다. 이른바 ‘오펜하이머 문제(In the Matter of J. Robert Oppenheimer)’라는 이름의 청문회. 그의 삶이 뒤틀리는 시간대다. 오펜하이머는 이미 원자력의 국제공동이용과 수소폭탄 반대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정부에 찍힌 상황이었다. 청문회에서는 과거 사회주의 경력, 스파이 의심을 받는 지인들, 사생활 문제 등이 쏟아져 나왔다. 누구나 그렇듯 오펜하이머도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사회주의자이면서 애국자였고, 평화주의자이면서 대량살상무기 개발자였으며, 양심적 지식인이면서 바람둥이였다. 청문회에 쏟아진 질문들은 그 모순들을 정확하게 찔렀다. 오펜하이머는 모든 의혹을 완벽하게 해명하지 못했다. 결국 보안 인가는 취소되었고, 다시는 정부 관련 업무를 맡지 못했다.

이야기의 한 축인 오펜하이머 청문회는 그의 삶이 뒤틀리는 계기를 보여준다.

    

셋째는 1959년. 전 원자력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트로스의 장관 임명을 위한 인사청문회가 열린다. 오펜하이머가 몰락한 이유가 설명되는 시간대다. 증인으로 참석한 과학자 데이비드 힐이 스트로스가 개인적 원한으로 오펜하이머를 모함했음을 밝힌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몰락이 단지 스트로스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당시는 대대적인 빨갱이 색출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스트로스의 공작도 그래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를 끌어내린 것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국가였다.



      

이 시간대들은 세 가지 역사적 사건과 맞물린다. 영화에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 내용이기도 하다. 

     

첫째는 양자역학이다. 원자폭탄은 양자역학의 현실적 결과 중 하나였다. 20세기에 갑툭튀한 이 학문은 기존과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요구했다. 원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뉴턴역학의 인과율과 결정론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군의 학자들이 상보성과 확률론에 기초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비로소 원자 세계의 구조와 질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에서 유학생 오펜하이머가 파블로 피카소의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여인」을 보고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는 장면도 이와 연관된다. 피카소의 큐비즘과 엘리엇의 모더니즘은 기존 패러다임과 단절하면서 새로운 예술양식을 창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에서는 양자역학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1939년 발견된 핵분열은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원자 운동을 인간이 통제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하필 폭탄이라는 형태로 나아간 것이 비극이었지만.

독일 유학 중이던 오펜하이머가 피카소의 작품을 접하는 장면은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임을 상징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물리학자들도 대부분 양자역학과 연관된다. 우선 오펜하이머는 괴팅겐 학파의 양자역학을 미국으로 이식했다. 그의 스승 보른은 양자역학이라는 용어의 창시자다. 레오 실라르드는 연쇄반응의 발견자이며, 엔리코 페르미는 중성자와 원자핵의 충돌 실험으로 핵분열의 발견자가 될 뻔했다(다만 실험결과를 잘못 해석했다). 오펜하이머가 스승처럼 여기는 두 사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영감(광양자가설)을 보어가 실체화(상보성과 코펜하겐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이어받아 양자이론을 확립(불확정성 원리)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초창기 양자역학의 문제의식을 여러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 감독의 물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둘째는 반파시즘이다. 이는 맨해튼 계획이 성공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다. 원래 미국에서는 핵물리학이 발달하지 못했다. 영화에서도 이를 반영한 장면들이 나온다. 우선 하이젠베르크가 미국에 돌아간다는 오펜하이머에게 “거긴 양자역학이 대접 못 받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장면. 그리고 오펜하이머가 그로브스에게 “원자폭탄 개발에서 독일이 몇 년은 앞서있다”라며 단언하는 장면도 그렇다.

     

이 차이를 따라잡는 동력은 유대인 과학자들에게서 나왔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은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여기에 뛰어난 과학자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레오 실라르드, 닐스 보어, 에드워드 텔러가 대표적이다. 페르미는 아내가 유대인인 경우였다. 오펜하이머도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혈통은 유대인이었다. 이들이 나치에 반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미국 정부에 적극 협력했다. 일단 나치를 이기는 것이 사회주의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반파시즘 공동전선(?)이 아니었다면 맨해튼 계획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과학자들이 아니었다면 맨해튼 계획은 성공할 수 없었다.


물론 반대쪽을 택한 과학자도 있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대표적이다. 순수 독일인이었던 그는 나치 핵 개발 계획(우란프로옉트)의 책임자였다. 오펜하이머의 경쟁 상대였던 셈이다. 여기에 핵분열의 발견자 오토 한도 참여했으니 미국이 긴장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의 연구는 별거 없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세기의 천재 소리를 듣던 하이젠베르크는 어이없을 만큼 원자폭탄의 기본 개념도 잡지 못했다. 패전 후 이들은 나치가 싫어서 일부러 태업했다고 주장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분명한 것은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이 더 뛰어났고 천조국의 물량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셋째는 매카시즘이다. 잘 알려진 대로 1950년대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도한 반공주의 운동이다. 매카시는 소련의 스파이 명단을 갖고 있다며 공안정국 조성에 앞장섰다. 그의 패거리는 공산주의 의심자들의 신상을 털어서 망신을 주고 밥줄을 끊어버렸다. 이러한 행태로 인해 마녀사냥, 인민재판에도 비유된다. 오펜하이머의 추락도 이 흐름의 일부였다. 영화에서 스트로스가 보좌관에게 오펜하이머의 몰락을 설명하는 장면에도 짧고 굵게 언급된다. “매카시의 시대였으니까” 즉 오펜하이머라는 국민 영웅도 몰락할 만큼 광기의 시대였다. 미국판 문화혁명이라는 비유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로 일약 국민 영웅이 되었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다만 오펜하이머가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맨해튼 계획은 워낙 사공이 많은 배여서 산으로 갈 확률이 높았다. 노벨상 수상자만 수십 명이었고, 이들이 육군의 지휘를 받아야 해서 통제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라는 뛰어난 관리자 덕분에 프로젝트가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 조직관리의 신 오펜하이머도 인간관계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주변에 스파이가 실제로 있었고, 오펜하이머는 이를 심각히 여기지 않았다.

     

클라우스 푹스가 대표적이다. 영국 출신의 푹스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플루토늄의 임계 규모를 계산하고, 폭탄 설계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푹스가 이 기술들을 소련에 넘긴 이유는 미국의 원자력 독점을 막고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덕분에 소련은 단 5년 만에 핵 개발에 성공했다. 푹스는 영국에서 합류했기에 오펜하이머가 직접 채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최측근에 둔 관리자로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UC 버클리의 동료 교수 하콘 슈발리에도 문제였다. 오펜하이머, 슈발리에, 그리고 영국의 조지 엘텐튼은 사회주의 조직에서 함께 활동했었다. 맨해튼 계획이 시작된 직후, 슈발리에는 엘텐튼의 부탁을 받고 오펜하이머에게 제안한다. 지금 하는 연구를 엘텐튼을 통해 소련에 넘겨줄 수 있다고. 물론 오펜하이머는 단박에 거절했다. 하지만 군 당국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슈발리에의 실명은 말하지 않았다. 중대한 패착이었다. 1946년 슈발리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오펜하이머도 어쩔 수 없이 진술을 번복하게 된다. 이는 오펜하이머가 원자력위원회 청문회에서 의심받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시간과 사건의 혼란스러운 상호작용은 영화에 복잡한 감정선을 만들어낸다. 헌신, 배신, 회한의 감정들이 격렬한 3중주를 연주하는 느낌이다.

    

오펜하이머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이념, 학문, 그리고 연인에게까지. 온화하면서도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강직한 성정을 영화는 꼼꼼히 그려낸다. 하지만 오펜하이머가 무엇보다 헌신한 대상은 국가였다. 그는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양자역학의 불모지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국가의 부름으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를 버렸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를 자본가 계급의 지배 도구로 본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이념 대신 국가를 택했다. 이러한 애국심은 영화 막판 아인슈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청문회로 고초를 겪는 오펜하이머를 안쓰럽게 여긴 아인슈타인은 조국을 버리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라며 거부의 뜻을 밝힌다.

양자역학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으나,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을 스승처럼 대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끝내 배신당한다. 오펜하이머에게 누명을 씌운 스트로스의 뒤에는 국가라는 더 큰 배신자가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국가에 바친 헌신은 공직 박탈이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청문회에 출석한 많은 동료도 불리한 증언을 했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있었던 에드워드 텔러가 대표적이다. 텔러는 핵분열 무기(원자폭탄)보다 핵융합 무기(수소폭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 동료들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사직하려는 텔러를 만류하며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텔러는 오펜하이머가 ‘국가 업무를 맡기에는 부적격’이라는 취지의 증언을 해버렸다. 결국 둘은 껄끄러운 관계가 된다. 영화는 이를 악수라는 행위를 통해 섬세하게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증언을 마치고 나가는 텔러의 악수에 응하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둘의 악수는 몇 년 뒤 반복된다. 1963년 오펜하이머가 미국 정부로부터 페르미상을 받는 자리다. 이 상은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오펜하이머와 텔러는 화해의 악수를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부인은 텔러의 악수에 응하지 않고 쏘아본다. 배신으로 점철된 오펜하이머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헌신과 배신의 엇나감은 회한으로 증폭된다. 학문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이 무엇인가? 국민 영웅에 대한 찬사는 이미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남은 것은 동료들의 배신과 공직으로부터의 배제뿐이다. 전쟁을 끝내려고 만든 원자폭탄도 마찬가지다. 그걸로 당장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그러나 핵분열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듯 세계는 군비 경쟁에 돌입할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을 초래할 것이다. 감독의 창작으로 추가되었다는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대화 장면이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둘은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했지만, 그 파멸적 결과를 우려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연쇄반응(대화의 맥락에서는 군비 경쟁)이 이미 시작된 것 같다는 오펜하이머의 말에 아인슈타인은 굳은 얼굴로 돌아선다. 오펜하이머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한다. 그 순간 미묘하게 드러나는 회한의 감정이 그 어떤 CG 효과보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마지막 장면의 임팩트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의외다. 오펜하이머라는 이성적인 인물을 조명하나, 작품에 흐르는 정서는 격정적이다. BGM에도 신경을 많이 쓴 듯하다. 사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는 화면보다는 음향에 있다. 트리니티 실험의 폭파 장면은 생각보다 임팩트가 적었다. 반면 조금씩 소리를 쌓아가면서 음산하고 기괴한 사운드를 내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인상 깊다. 그 옛날 어어부 프로젝트를 연상시키는 실험적 사운드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이라는 다분히 국뽕스러운(미국인 입장에서) 소재를 다루지만, 서사의 초점은 개인의 내면, 또는 개인과 역사의 긴장에 맞춰진다. 오펜하이머와 맨해튼 계획을 이렇게 원래의 이미지와 동 떨어진, 낯선 영상으로 창조할 감독이 또 있을까 싶다.


서사의 폭발력 대단하다. 시간, 사건, 감정 등의 차원에서 흩어져 있던 장치들은 이야기가 흘러가며 서로 연결되고 맞춰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지막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의 대화 장면으로 합류한다. 이미 트리니티 실험의 폭파 장면은 지나간지 한참이고, 조국에 배반당한 오펜하이머의 운명도 정해졌다. 그럼에도 이 마지막 장면에는 묘한 임팩트가 있다. 영화 내내 휘몰아쳤던 복잡한 감정들을 정리하고 매듭짓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툭 놓아 버리는 느낌이다. 첫 번째 관람했을 때는 이걸 잘 몰랐다. 영화를 다 보고 집에 왔는데도 계속 남아있는 두근거림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보고 나서야 마지막 장면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3시간이 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관객의 내면에는 복합적인 감정들이 피어오른다. 그것들은 마지막 장면까지 뒤엉킨 채로 이어진다. 하지만 감독은 그걸 어떻게 하지 않는다. 그대로 관객들이 안고 나가게 만든다. 이 복잡한 스토리에서 완벽한 마무리를 이끌어낸 연출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