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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대웅 Jun 20. 2023

꿈꾸는 리얼리스트가 전하는 희망의 문장

박정옥(2019), 『나도 빌리처럼 : 동네 공인의 꿈』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체 게바라의 명언이다. 좌우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문장이다. 물론 혁명가가 갖춰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직장인도 되새겨볼 만하다. 직장인의 삶이란 곧 기계 속 부품과 같다. 회사를 수십 년 다니려면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비정하고 냉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신만 불행해진다. 그렇다고 그게 삶의 전부여서는 안 된다. 가슴속에 작은 불씨 하나는 남겨 둬야 한다. 그조차 없다면 삶이 황폐해질 테니까.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의해 살아질 것이니까. 내 가슴속에 품은 작은 불씨는 글쓰기다. 회사원으로 살면서도 작가로 인정받고 싶다. 브런치를 시작하는 데에도 체 게바라의 이 문장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최근 이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책을 읽었다. 박정옥 작가의 『나도 빌리처럼 : 동네 공인의 꿈』이라는 수필집이다. 수필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다. 브런치 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문학과 거리가 멀다. 주로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읽는다. 출간을 준비하면서부터는 팔자에 없던 자연과학도 꽤 읽고 있다. 이런 책들은 읽기가 쉽지 않다. 자꾸 버퍼링이 생겨서다. 한 문단을 반복해서 읽거나, 이미 지나온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게 힘들게 읽어도 이해 안 가는 내용도 많다. 그럴 때마다 좌절과 함께 자학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피곤한 일상을 보내던 중에 이 책을 만났다. 감성적인 제목과 따뜻한 문체에 끌려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절반을 읽고, 다음 날 나머지 절반을 읽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니 놓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주제는 공감되고, 서사는 친근하며, 문장은 흡입력이 있었다.

     

저자는 갓 등단한 신인 작가다. 그런데 살아온 이력이 녹록하지 않다. 일단 저자는 명문대를 졸업한 의사다. 목동에서 수십 년 개업의를 하며 환자를 돌보고 있다. 게다가 (이 부분이 중요하다) 두 아들을 둔 워킹맘에다 시부모님도 오래 모셨다. 요즘 세태에서는 드물다 못해 거의 멸종하지 않았나 싶은 가족 구성이다. 딸 하나를 둔 나 역시 저자의 가정환경이 잘 실감이 안 된다. 의사 일을 하면서, 아들 둘을 키우고, 시부모님도 봉양한다고? 저자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치열하게 살았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어느 노래 가사에서 그랬다.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이라고. 저자의 삶도, 물론 사랑으로 충만하고 보람되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전쟁 같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글에서는 그런 기미를 전혀 느낄 수 없다. 평범한 일상을 다룬 이 글들에서 주로 배어 나오는 정조는 꿈에 대한 진지한 희망이다. 저자는 (글에서 남편이 놀리듯)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글을 쓰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첼로를 연주한다. 막연한 꿈에서 발동한 일이지만 뭐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다. 첼로를 배우려고 헬스부터 다녔다는 일화, 50이 넘어서 등단했다는 성과에서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 사실 명문대 출신 의사라는 배경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이룰 거 다 이룬 삶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세간의 인식과 거리가 멀다. 세상에 막 첫발을 내딛는 청년처럼 꿈에 민감하고 또 진지하다. 그의 배경을 고려해 보면, 직장과 집에서 맡아야 할 역할만으로 에너지가 쉽게 고갈될 것 같다. 그런데도 작가와 연주자라는 아득한 목표도 놓지 않는다. 마치 꿈이라는 무한의 배터리에서 끊임없이 그 동력을 충전해 내는 것 같다.

     

책 제목의 ‘빌리’는 이러한 삶의 자세를 함축하는 단어다. 영화와 뮤지컬로 유명한 <빌리 엘리어트>의 그 빌리다. 저자는 발레리노라는 남다른 꿈을 바라보며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빌리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제목과 동명의 글에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온 날의 기록이 눈에 띈다. 저자는 공연의 감상을 한가하고 평화로운 감상으로 넣어두지 않는다. 자신의 신산한 현실로 가져와 단단한 꿈으로 잇는다.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힘차게 날갯짓하는 두 팔을 보며 나도 빌리처럼 마음껏 비상하고 싶었다.” 이 문장의 일부가 그대로 책의 제목이 되었다.

     

만약 저자가 그저 몽상가였다면 이 책의 울림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꿈을 좇는 로맨티시스트이면서 현실에 충실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한 동네에서 오래 생존한 가게는 업종 불문하고 신뢰가 간다. 동네의 한 자리를 수십 년 지킨 저자의 병원도 그런 지위에 있는 듯하다. 어린아이부터 90대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이 찾아온다. 의사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서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진다. ‘주사실 풍경’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주사를 놓으려는 어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제목 그대로 풍경처럼 그려진다. 세 살배기 딸을 둔 나도 병원에서 주사를 놓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봤다. 협박, 칭찬, 보상 등등. 그래서인지 저자의 생생한 묘사에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반면 ‘브라보 9학년’은 비슷한 관찰의 글인데도 전해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나는 이 글에서 노인들이 삶에 대한 노욕으로 보일까 봐 병원 오기를 꺼린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20여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도 그래서 병원 가셔야 한다는 말을 잘 듣지 않았던 걸까. 그때는 그런 이유가 있을 줄 짐작도 못 했다. 저자는 그들에게 소설 『노인과 바다』를 들어 위로를 건넨다. “물고기에게 진 게 아니라고. 사실은 크게 이긴 거라고.” 아직 노인이 아닌 나까지도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3부의 ‘나의 첼로 이야기’였다. 악기 연주에 대한 로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나만 해도 김동률이 그랜드 피아노를 치며 <동반자>를 부르는 걸 보고 혹해서 피아노를 배워볼까 싶었으니까. 그리고 ‘30대 이상 환영’이라 써 붙인 피아노 학원 앞을 몇 번이나 기웃거렸으니까. 하지만 결국 “에이... 이 나이에 무슨...” 하면서 포기한 것이 꼭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저자도 시작은 비슷했던 것 같다. 다른 이들처럼 꿈은 꿈으로 남겨두자며 도피하지 않은 것이 달랐을 뿐. 그래도 역시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자세를 잡는 데만 몇 달이 걸리고, 소리를 내는 데 또 그 이상이 걸렸단다. 몇 달을 <나비야>만 연습하다가 1년 만에 <작은 별>을 시작했다니, 나였으면 분명 그 단계에서 때려치웠을 것이다. 중간에 집안일로 연습을 쉬기도 부지기수였고, 어깨 혹사로 건강도 나빠졌으나,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첼로 분투기는 4년 만에 앙상블 모임을 시작해서 7년이 넘어 첫 공연을 했다는 결말로 담담히 마무리된다. 위트 넘치는 필치와 자학 개그가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무려 7년이라니, 이 정도 노력은 한 뒤에야 꿈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였다. 저자 소개의 한 줄을 당당히 차지한 ‘관현악단 단장’이라는 경력이 그래서 새삼 대단해 보였다.

     

사실 “나는 ~하는(되는) 게 꿈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도 없다. 꿈이란 단어는 폭넓은 용례만큼이나 쓰기가 쉬운 단어다. 나도 살면서 저런 식으로 꿈을 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꿈이란 단어를 그렇게 쉽게 쓰는 게 맞을까. 꿈이라 말해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에게 이 단어는 그저 사치이지 않을까. 적어도 꿈이라고 말하려면 그에 어울릴만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몇 년 전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속 강마에(김명민 분)의 대사다.

    

꿈? 그게 어떻게 니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그건 별이지. 하늘에 떠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 하는 쳐다만 봐야 하는 별. 누가 지금 황당무계한 별나라 얘기하쟤? 니가 뭔가를 해야 될 거 아냐. 조금이라도 부딪히고, 애를 쓰고, 하다못해 계획이라도 세워 봐야 거기에 니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지는 거 아냐. 그래야 니 꿈이다 말할 수 있는 거지.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다 니 꿈이야? 그렇게 쉬운 거면 의사, 박사, 변호사, 판사 몽땅 다 갖다 니 꿈하지 왜? 꿈을 이루라는 소리가 아냐. 꾸기라도 해 보라는 거야.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때 몹시도 좋아했던 이 대사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새삼 저자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꿈을 좇는 삶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자는 서두에 언급한 체 게바라의 문장과도 같은 사람일 것이다. 현실에 분명히 발 딛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이상에 머무르는 작가일 것이다. 그의 글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그의 문운(文運)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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