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다른 분들은 다들 그래도 어느 정도 이름 있는 대학은 나오셨는데, 어디? X대학? 토익은 몇 점? 진짜 회사 좋아졌네. 토익 최소한 800은 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외국계 회산데.
저는 어디 가서 이름 꺼내기도 창피한 2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가게 된 사유야 장편소설이지만 차마 이 글에 다 담지 못하기에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업보' 정도가 적당할 거 같네요. 동물의 똥 냄새가 진동하던 그 학교를 참 열심히도 다녔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대학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누군가 대학얘기를 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2년제 전문대. 어디라 밝히긴 어렵지만 대부분은 '그런 대학도 있어?'라는 반응이 나올법한 그런 곳. 오로지 저의 선택이었고, 거기라도 가야만 했습니다. 생각보다 잘 치른 수능점수가 너무나 아까운 그런 대학을 나왔어요. 제가 입학생 중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으니 뭐 어느 정도 수준인지 말로 하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가실 겁니다. 1년의 재수기간 영혼까지 끌어모아 공부를 했었는데, 심지어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하지 않고 수능을 봤어도 들어갈 수 있었네요. 그런 아이들이 꽤나 많았습니다. 수능 개판치고 어디라도 가야 할 거 같아서 왔다고. 심지어 제가 들어간 과는 미달이어서 원서만 내면 받아주었거든요.
무튼, 그렇게 마음의 짐처럼 차라리 고졸이 나을 거 같다 정도의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서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그럽니다. 너 공부머리 좀 있는 거 같은데 학점을 채우고 대학원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저도 그러고 싶었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백수로 학점은행제를 하며 대학원을 진학한다는 것은 일단 금전적으로도 불가능이었고. 일하던 직종자체도 퇴근시간이 들쑥날쑥이라(주에 3,4일은 야근을 했으며 끝나는 시간은 매일 장담하지 못하는 그런 직종이었습니다.) 꿈도 꿀 수 없었죠.
운칠기삼. 딱 맞는 말 같습니다. 저의 인생경험으로 비추어봤을 때, 정말 인생은 운칠기삼이 정확한 거 같아요. 정말로 운이 좋게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외국계 회사에 당당히 입성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외국계회사에 내가 입사하다니! 마치 인생의 큰 목표를 이룬 거 같은 거대한 성취감에 휩싸여 정신 못 차리고 일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와, 이런 일이 진짜 있긴 있구나.' 싶을 정도로 정말 믿기지 않는 상황.
외국계회사를 동경했습니다.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와 한국회사들 보다는 평등한 위치에서 일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 그리고 실제로 30대 초반, 그 꿈꾸던 외국계회사에 입사하며 꿈같은 나날을 보내던 그 어느 날. 환영회를 한다며 팀메일이 도착합니다. 입사하고 한 달이 지나서 가지게 된 환영회 겸 회식자리. 다른 프로젝트를 하느라 뵙지 못한 상사분들까지 보게 되는 자리라 그런지 긴장도 되고, 그들만의 리그에 들어간 거 같은 소속감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던 바로 그날.
한 명의 대리 나부랭이가 저의 기분을 처참히 짓밟았습니다. 특이한 성을 가졌던 그분. '이것이 팀이란 것인가.'를 생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때.
X대리. 담배 피나?
네!
담배 한 대 피러가지?
알겠습니다!
공손히 불도 붙여드리고, 바로 내 위에 대리였기에 조금은 긴장. 무슨 얘기를 하려나. 담배를 연거푸 피던 그때. A대리가 입을 엽니다.
A : 어때, 좋지? 나도 입사한 지 몇 개월 됐는데 이 회사 참 좋은 거 같다.
나 : 아네! 평소에 너무 오고 싶어 했던 곳이라 그런지 전 더 좋습니다 하하.
A : 아 참. 대학 어디 나왔다고 했지? 내가 듣질 못해서.
나 :... 아네, XX대학 나왔습니다.
A : 어디?
나 : XX대학이요. 생소하실 수 있는데, 어디 어디에 있는 대학입니다.
A : 아.. 토익은?
나 : 아네 토익은 XX점입니다. 프리토킹은 아직 좀 힘든데, 커뮤니케이션엔 큰 문제없을 겁니다!
A : (살짝 벙찐 표정의 A대리)
나 : 선배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A : 난 X대학 나왔고 토익은 X점.(제 기억에 850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입사할 때 토익이나 이런 거 안 물어보던가?
나 : 아네, 질문이 있었는데 제가 답변을 잘한 거 같습니다.(이때부터 표정관리가 안 되기 시작함)
A : 여기 다른 분들은 다들 그래도 이름 있는 대학 나오셨는데, 어디? X대학? 토익은 몇 점? 진짜 회사 좋아졌네. 토익 최소한 800은 넘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외국계 회산데.
나 : (인내심의 한계, 순간 그 인간을 노려 봄) 전문대가 뭐 어때서요? 저 그래도 마지막 남은 8명과 경쟁해서 당당히 뽑혀 입사했습니다. 토익은 틈틈이 공부해서 그래도 800점대 까지는 해놓으려고 생각 중입니다.
A : 하.. 참 ㅋㅋㅋㅋ
그렇게 순간 참지 못하고 마음속 말을 쏟아냈고, 전화 좀 한다며 남아서 연거푸 두 대를 더 피웠습니다.
하... XX.. 짜증 나네..
돈 없는 집도 짜증 났고, 어린 시절의 나의 행동들도 짜증 났습니다. 그중에 A대리가 제일 짜증 났었죠. 다시 들어간 회식자리. 즐겁지 않습니다. 그저 영혼 없는 웃음을 띄우며 그렇게 시간을 때우다 다들 2차를 가잡니다. 저 대화 이후로 마음속에는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화가 너무 나던지라, A대리 뺨따귀를 후려쳐버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똥 씹은 듯한 기분으로 내가 꿈꾸던 회사에서의 첫 번째 회식자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사필귀정. 전 이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쁜 놈들이 더 성공하는 게 지금의 세상이라고 일정 부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저때만큼은 사필귀정이 있더군요. 첫 회식 이후 3개월 즈음 지났을까. 팀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A대리 잘린다면서? 지금 일 하나도 안 하고 팀장이 3개월 줬다던데? 3개월 간 일 안 하고 출근 안 해도 월급은 받게 해 줄 테니 다른 직장 알아보라고 했다 하더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쩐지 팀 공유메일에 항상 이름이 빠져있어 의아했었는데.
그렇습니다. A대리가 회사를 나가고 한참 뒤에나 들을 수 있었던 진실. 그 양반 근태가 아주 개판이었더군요. 회식하고 다음 날 지각을 밥 먹듯이 하고, 출근시간이 넘어 윗 상사가 전화하면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어버린다던가, 심지어 어느 날은 전날 타 회사 영업들과 술자리를 가지고선 전화도 꺼놓고(꺼진 거겠죠. 일부러 꺼 놓은 건 아닐 테고.) 무단결근. 몇 개월을 참다 참다 바로 윗 상사가 팀장에게 보고하고 팀워크에 지대하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판단하에 퇴사수순을 밟게 된 것이죠.
좋은 대학 나와서, 토익 점수 잘 받은 양반이 신입사원들도 지키는 그 기본을 못해서 나가리 당했더군요. 이후에 어느 회사를 가네 마네 소리를 듣긴 했습니다만, 별로 안중에 없었습니다. 회식자리에 얼굴 안 보여서 속은 후련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