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는 것도 용서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다.
다합으로 가는 심야버스를 예약하기 위해 터미널로 향한다. 탈 때마다 애를 먹이던 택시기사가 오늘 좀 다르다. 원하는 대로 지불하란다. 호스텔에서 사전에 조사해 둔 요금 15파운드를 낸다. "아 돈 마인드. 땡스." 말도 안 된단 걸 알지만 카이로를 용서한 덕분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버린다.
버스는 밤 12시에 출발한다. 호스텔 로비에서 와이파이나 하면서 뻐기려는 계획이었다. 돌아다니기엔 이곳이 너무 지긋지긋했으니까.
용서하기로 한 마당에 무슨. 구질구질하다. 맘을 고쳐먹는다.
돌아오는 길은 택시를 타지 않고 걷는다. 기온은 33도. 길은 미로같고 시끄럽고 무엇보다도 매캐하다. 그래도 걸을 테다. 나일강도 볼 겸.
15파운드, 고작 1800원을 아끼려는 심산이 아니다. 순례길로 삼는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뺨을 때린 사람에게 다른 쪽 뺨도 내어주라고 했다. 조금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원수를 사랑하랬다.
카이로에 오고 처음으로 85mm 렌즈를 꺼낸다. 카메라에 어떤 렌즈를 끼우느냐에 따라 내가 보는 세상도 달라진다. 10mm를 장착했을 땐 매크로한 세계를 본다. 황토색 빌딩 숲과 거리, 나일강이 넓-게 시야에 들어온다.
85mm를 들면 세상이 마이크로하게 변한다. 물담배를 물고 뻐끔뻐끔 연기를 뿜는 아저씨. 말에게 여물을 먹이는 짐꾼. 툭툭을 모는 꼬맹이. 멀리 있는 걸 당겨 보고 작은 대상에 집중한다.
카이로 거리가 새삼 즐겁다. 아무렇게나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폼을 잡는다. 나도나도 찍어달라고 난리다. 내 복장을 훑고 무어라 소리치면서 날 아시안 원숭이 취급하던 사람들이 말이다. 이번엔 이들이 내 뷰파인더 앞에서 이집션 원숭이가 됐다.
인도가 없어 찻길로 한참을 걷는다. 걷고 걸어 나일강에 다 다랐다. 복잡한 차도 옆에 잘 가꿔놓은 정원이 보인다. 무더위와 매연 탓에 영 지쳐있었는데, 땡큐다. 들숨과 날숨이 이렇게 자유로운 것이었다니. 드디어 마음껏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이어폰을 꺼내 한국에서 신물나게 듣던 볼빨간사춘기의 노래를 튼다. 가사와 풍경이 어울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뭔가 생각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대강 억울함과 미안함, 그리고 감사함에 대한 것이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