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린이 4개월 차. 그동안 실내 연습장에서만 공을 쳐왔는데, 야외 코트를 잡아 테니스를 치자는 제안을 처음 받았다. 후훗. 숨겨진 천재. 드디어 세상 밖으로 등장...? 은 개뿔. 천성이 집돌이라 레슨도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실내테니스장에서 근근이 이어나가고 있는데 야외활동이라니. 게다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운동이라니. 아무리 테니스가 재밌어도 그건 내게 무척이나 큰 결단을 내려야 하는 사안이었다.
코트를 예약해 놓은 동기의 제안에 무려 3시간 동안 간을 봤다. 코트를 예약한 동기의 인내심이 부글부글 끓어 간이 마침내 짭짤해질 때쯤, 참다못한 동기가 집으로 쳐들어와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이렇게 뻐기다가 막상 나가면 개 얄밉게 제일 신나게 놀 거 뻔히 보이니까 그만 재고 그냥 나와”
생각보다 손바닥 위에 나를 올려두고 사는 사람이 많다. 날씨는 좋고. 테니스장 너머로 전철은 지나가고. 꽃잎이 떨어지고. 완전 일본영화 아냐 이거. 동기의 예상대로 나는 공원에 풀어놓은 똥강아지 마냥 신나서 뛰어다녔다. 이래서 동기가 개 얄밉다고 한 건가. 무튼. 오래간만에 중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공이 코트 밖으로 나가도 깔깔 웃기고. 동료가 헛스윙을 해도 즐겁고. 사소한 해프닝에도 계속 웃음이 났다. 머리 꼭대기에서 비추는 정오의 햇살이 따스했다. 이 잠깐의 행복 뒤에 다시 걱정의 세계로 돌아가야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행복의 태양이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걱정의 그림자 따위 생기지 않았다. 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으면. 이 시간이 계속됐으면.
좋다. 참 좋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동기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개 얄밉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온다 했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던 서른 살에서 어느덧 무려 4년이 더 지났다. 어찌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 수만 있다면 살겠다. 욕심을 버리고. 관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소중한 사람과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사는 삶. 무엇보다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삶. 행복의 태양을 정수리 위에 영원히 머물게 할 수는 없을까. 그런 게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소망을 자주 품는다. 그리고 늘 괴로워했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뜨고 그림자가 지는 일이 자연의 섭리이듯. 늘 걱정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소망일지도 모른다. 벤치에 앉아 친구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듣는 동안, 어느덧 정수리 위에 떠 있던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곧 내 등 뒤로도 그림자가 생길 것이다. 코트의 예약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