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멘터와의 대화

by 지호지방이

연출자인 H는 후배들이 꺼려하는 선배다. 올해로 22년 차인 그는 말이 너무 많았다. H선배에게 붙잡히면 최소 두 시간은 날릴 각오를 해야 했다. 좋은 드라마가 뭔지. 좋은 연출은 무엇인지. 3년 전에 OTT드라마 한 편을 연출했는데 그 과정에서 프로듀서와 배우들에게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지금의 회사는 다 정치놀음이며 예전 영광의 시대가 얼마나 반짝반짝 빛났는지. 어쩌구저쩌구. 이러쿵저러쿵. 국회에서 그를 필리버스터의 마지막 연사로 영입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말은 한 번 시작되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H선배가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면 후배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거나 수화기를 들고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 같이 짠 듯이 자리를 벗어나는 그 광경이 <SNL>이나 <직장인들>에 나오는 콩트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방송계를 MZ가 장악했다 하더라도 22년 차 선배를 쌩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강호의 도리를 지키느라 H선배에게 피 같은 시간을 헌납한 PD후배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가 후배들을 너무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는 후배들과 이야기가 나누고 싶다.


나는 남몰래 H선배에게 디멘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 끝장이다. 그 순간 영혼이 빨려 나가는 대화가 시작된다. 특히 밤 시간이 가장 위험하다. 야근 중에 H선배에게 잡히면 10시 퇴근이 12시 퇴근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야심한 시각. 사무실에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를 피하지 못했다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인기척을 애써 무시하고 일에 집중하는 척하면 디멘터는 다른 희생양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런 수법이 통할 리가. 이런 젠장. 하필이면 그날은 사무실에 나밖에 없었다. 나는 갑작스레 출현한 디멘터의 기척을 느끼고는 이 악물고 모니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익스펙토 페트로눔. 익스펙토 페트로눔..... 하지만 사무실에 나밖에 없었기 때문일까. 그날은 주문이 통하지 않았고 디멘터도 떠나가지 않았다. 잠깐이면 모를까. 주변에서 인기척을 내고 있는 그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강호의 도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은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H선배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단막 입봉 한다며?”

“.......”


그는 회사에 몇 없는 연출 선배였다. 어차피 허공에 날려버릴 시간. 이왕 그럴 거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심 나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대본작업이 잘 안 풀릴 때 작가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배우에게 연기 디렉션은 어떻게 줘야 하는지. 촬영감독과 콘티적으로 이견이 있을 때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해야 하는지. 등등.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너무 무섭고 외로웠다. 확실한 나의 취향과 계산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모든 영역에서 긴가민가하고 잘 모르겠을 때가 많았다. 너무 막막했다. 이 드라마의 톤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소품을 컨펌해 달라는데 이게 괜찮을지. 이 장소가 어울리는지. 매 순간 작으면 작게 크다면 크게 ‘나도 잘 모르겠는’ 순간이 많았다. 그런 식으로 내가 갈팡질팡 할 때마다 나의 이런 초라함을 스탭과 배우들에게 들킬까 봐 무서웠다. 참 고맙게도 이번에 함께한 스탭과 배우들은 나의 그런 초라함마저도 왜곡 없이 바라봐주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H선배에게 나도 모르게 그런 두려움과 고민을 막 털어놓았다. 오히려 그날의 그는 말을 하기보다는 들어주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내가 그보다 말을 더 많이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조금의 두려움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이해하는 눈빛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위로를 받았다. 디멘터에게 그런 눈빛을 받을 줄은 몰랐다. 오히려 그는 평소처럼 막 구구절절 조언을 한다기보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사라졌다. 뭐랄까... 22년 차 내공이 느껴지는 도인 같은 말이랄까. 그가 남긴 말은 이러했다.


“연출을 하려면.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세상을 알아야 한다”


나를 아는 것이 시작이다.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해 더 탐구해 보도록 해라. 무협지의 마교 교주 같은 사람이 할 얘기를 하고 디멘터는 사라졌다.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세상을 알았다면, 나는 드라마 연출 따위가 아니라 진즉에 주식 부자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현장에서 촬영을 하는 내내 그가 남긴 말이 종종 떠오르곤 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였다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일들에서, 나는 나에게 더 집중했다. 내가 어떤 씬을 찍을 때 행복한지. 어떨 때 힘든지. 갈등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예민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었는지. 몰랐던 스스로를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H선배와 대화하던 그날이 떠올랐다. 다음에 드라마를 한다면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지, 어떤 톤의 드라마를 하고 싶은지 조금은 구체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디멘터와의 대화 덕분이었을까. 늘 안갯속에 가려져있고 실체가 없었던 나만의 패트로누스를 찾은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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