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리매거진 Jul 09. 2020

페미니즘 담론;  누가 외투를 벗기는가

지금 페미니즘에 필요한 생각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대학교 3학년 전공수업부터였다. 페미니즘에 대한 한 남 선배의 발언에 대해 격분하여 마이크를 쥐고 그의 발언을 비판했다. 교수에게 마이크를 달라고 손을 들기까지의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그냥 저 쓰레기 같은 발언에 내가 한마디 해야겠다, 여성을 함부로 폄하하고 알량한 상식으로 범죄와 폭력을 애써 포장하려는 저 무식한 발언을 틀렸다고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답변은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처럼 명료하고 논리적이었다. 그 수업이 끝난 뒤 여성 학우들은 내게 와서 이야기했다. 정말 멋있었다고. 속이 다 시원했다고.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얼떨결에 한 말이 무슨 대단한 용기라도 낸 것처럼 포장되고 학우들은 나를 칭찬했다. 스스로 뿌듯했다. 그리고 마치 여성인권 운동가라도 된 듯한 기분에 휩싸여 여성 인권에 대해 더 자주 많이 이야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것이 나의 ‘각성’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더는 화장품을 사지 않고 화장도 줄여갔다. 머리를 자르고 몸을 답답하게 하던 옷은 다 버렸다. 좋아하던 아이돌에게도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꾸밀 줄 모르는 여자는 게으른 것이다, 말은 상냥하게 해야 한다, 웃을 때는 너무 크지 않게, 적당히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 하고, 입조심, 몸조심해야 한다, 같은 그동안 수없이 많이 들어왔던 잣대들에 혀를 차고 비웃어 주었다. 그렇게 하나씩 지난 날의 코르셋을 벗어 던져 가면서 나는 점점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편안해졌다. 마치 숨어있던 불변의 진리를 찾은 것처럼, 내가 앞으로 살아갈 방식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결코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세상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른 이유만으로 그 유명한 ‘탈코’냐며 조롱하는 인간들과 항상 웃기를 강요하는 아르바이트 사장님이 있었다. 나는 서서히 분노했고 비판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사회 전반의 것들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다가 붙였다. 매일 마주하는 많은 사람들, 그들과 대화하며 오가는 많은 말들, 나와 상대방의 행동 속에서 누군가가 여성을 비하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 행동에 내가 모른 척하고 있지는 않은 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 과정이 꼭 마음에 들었거나 즐거웠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여부와 관계없이 마땅히 틀린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내가 하는 페미니즘이 옳은 것이며 여성을 혐오하는 가부장제 중심의 사회가 틀린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끔은 생각 없이 지나가고 싶고 지치기도 했지만, 눈에 힘을 주고 비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 삶이 계속되자 어떤 부작용 같은 것이 생겼다. 그건 옳고 그름만을 찾고 이야기하는 내가 과연 옳은가? 하는 의심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옳고 그름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최우선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여성 인권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뜨겁게 토의하던 친구가 립스틱을 꺼내 바르는 것을 보고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 순간 그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페미니즘에 이야기하기 전에 탈코르셋부터 하고 와야 한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그가 립스틱을 바른다고 해서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여성인권에 도움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 만으로 여태까지 긴 시간을 들여 나와 여성인권에 대해 이야기한 친구의 말들이 모두 쓸모 없고 잘못된 것이라 생각해 버릴 수 있는가. 나 조차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 페미니즘을 알고 믿게 된 지 몇 년, 몇 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누군가를 단편적인 행동을 보고 페미니스트이다, 아니다, 판단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가령, 내가 페미니즘을 아주 잘 알고 공부한 지 오래되었다고 해도, 친구가 립스틱을 바른다고 해서 배신감을 느끼고 그에게 나쁜 감정을 속으로 품을 필요는 없다. 친구의 행동이 여성인권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솔직하게 ‘근데 왜 립스틱 발라?’라고 물어보는 편이 낫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고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그 친구에게는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끝끝내 버리지 못한 코르셋일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한 습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페미니즘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친구의 행동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오해는 아주 작은 찰나에 어떤 방식으로든 생길 수 있으며, 립스틱의 찬반여부보다는 그 친구가 가부장제에 반대하고 있고, 우리가 긴 시간을 들여 여성인권에 대해 토론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 과연 그의 립스틱 바르는 행동이 그가 싫어질 만큼, 우리가 전에 했던 모든 대화를 무시할 만큼 중요한가? 립스틱이 곧 그가 하는 페미니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꽤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물음 속에 갇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느끼던 친구가 한 순간에 혐오스러워진 이유에 대해서.


 어떤 행동들은 맞다, 틀리다의 기준이 아닌 이해나 용인의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있다. 페미니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모든 행동이 그렇다. 그러니 달리 페미니즘에만 옳고 그름의 잣대를 과하게 들이댈 필요는 없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비판을 오로지 비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여성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검열과 잣대 속에서 살아왔다. ‘할 수 있다.’ 보다 ‘하지 마라.’ 또는 ‘해야 한다.’라는 말을 훨씬 많이 들으며 살았다. 그런 여성들에게 성급하게 또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미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잣대들과 마주하는 여성으로서의 삶,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이란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법정과 다름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부디 모든 여성이, 페미니스트들이 옳고 그름만을 쫓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만나고 우리의 삶은 전보다 조금 속 시원해지고 명료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수없이 많은 딜레마와 논쟁거리가 우리 주위에 있다. 누군가가 ‘이런 게 페미니즘이다.’라고 정해 놓는 순간 그 범위 밖에 있는 여성들은 불안해하고, 그 안에 있는 여성들은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설득하거나 우리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보다 우리가 다른 점에 대해 토로하는 선에서 그친다. 나는 이 편 가르기가 여성을 갈라놓고 있다고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연대감이나 위안에 더 집중해야 한다. 긴 세월을 지나 드디어 페미니즘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 온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받았던 억압과 비난을 먼저 털어 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된다면 우리는 더는 편 가르기가 아닌, 비로소 열린 비판적 사고와 심층적인 토의가 가능하다. 우리의 뜨거운 논쟁이 이해와 연대도 고려한 조금 더 느슨하고 넓은 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자 바람이다.


 또한 우리가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페미니즘 사상을 접한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대부분 과정에 있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들어본 여성,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이 어려운 여성, 공부하고 있음에도 사회의 여러 잣대 때문에 포기해버리는 여성, 옳고 그름만을 쫓다가 외로워진 여성 등 그 단계가 다를 뿐이지, 우리 대부분은 모두 과정 중에 있다. 그러므로 이 긴 여정 중에 있을 수 있는 실패와 고비에 걸음을 늦추기보다 먼저 연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우리의 일행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잡지는 그러한 과정 중의 첫걸음이다. 현재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교과서는 많다. 아직도 더 많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다르게 말하자면 교과서만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옳은 길을 안다고 해서 도착지에 모두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튼튼한 다리와 체력, 인내심도 있어야 한다. 싸우거나 다치지 않고 성평등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 잡지를 준비했다. 우리는 전문가도, 페미니즘에 대해 오래 연구한 연구원도 아니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알려줄 수 없다. 우리가 준비한 이야기는 이 글을 읽는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한 평범한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과 위안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우리가 앞으로 페미니즘을 외치는 데에 있어 튼튼한 다리와 체력과 인내심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누구나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고민하고 흔들린다. 도착지까지 멀게만 느껴질 때, 문득 혼자인 것만 같을 때, 이 잡지가 여러분의 손을 잡아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우리의 일은 시작되었다.


 바람과 해가 내기를 했다. 누가 저 사람의 외투를 더 빨리 벗기는지. 누구나 알 법한 이 유명한 동화에서 주는 교훈을 나는 믿는다. 지금 우리에겐 햇살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을 외롭게 걷고 있는 수많은 여성을 등 돌릴 틈도 없이 따스하게 비춰 줄 햇살. 서로 햇살이 되어 사회와 가부장제가 마구잡이로 입혀 온 외투를 벗겨야 한다. 비로소 기본형의 인간으로, 잃어버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지금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투를 벗기는 일이 우리가 더 큰 목소리를 내기 위한, 더는 외롭지 않기 위한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