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 우울증으로 누워만 있던 엄마가 갑자기 체육복을 사 왔다
내가 12살이 되던 어느 여름, 화창한 날이었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던 엄마는 매년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통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서 말을 걸어도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누워만 있던 엄마가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불렀다. 그리고 새 체육복을 내밀었다. 깨끗하게 빨아 가을 햇빛에 바짝 말린 뽀송한 새 체육복에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엄마 이게 뭐야?"
"새 체육복이야. 너 체육복이 너무 작아졌더라."
"엄마.. 근데 이제 괜찮아? 아직 여름인데.."
"..."
나는 새 체육복을 들고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1년 중 여름과 초가을에는 누워만 있었다. 다른 계절에는 나와 내 동생에게 말도 많이 하고 학교에도 와서 학부모 모임도 참여하고 여느 엄마처럼 다정하고 친구 같았다. 아직 가을이 오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어딘가를 가서 무엇을 사 오고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거는 네 동생 거."
내 것만이 아니라 동 생것까지 새 체육복을 사서 주었다.
"민이는 체육복 아직 괜찮은데."
"그래도 또 금방 클 거니까.."
똑같이 새것을 빨아 바짝 말린 동생의 체육복도 내손에 넘겨주고는 다시 엄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다른데.. 이상한데 무엇이 이상한지는 모르겠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엄마가 다 나았나 싶은 기대감이 꾸물꾸물 올라왔다.
방문을 살짝 열고 엄마를 살펴보았다.
어둡게 커튼을 치고 이불을 펴서 뒤돌아 누워있는 엄마의 등만 보였다.
엄마를 불러보고 싶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괜 시래 엄마가 오랜만에 기운을 내었는데 내가 잘 못 말해서 엄마의 유리 같은 마음에 흠집이나 낼까 두려웠다. 그냥 오늘은 엄마가 한 번 일어나서 나와 동생을 위해 체육복을 사서 빨고 말려서 나에게 주었다는 것만으로 좋은 그 기분을 가지고 있어야지.
그냥 그날은 빨리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왔으면 했다.
그러면 엄마가 오늘처럼 일어나서 나와 눈 맞추고 또 이야기해주겠지 그랬다.
그렇게 그날은 엄마가 나을 것 같은 그런 기대가 생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