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서와 기독교 <수업 노트>
성서와 기독교 <수업 노트>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목차
프롤로그
‘인간이 인생에 부여한 의미는 허구에 불과한가?’
- 의미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
-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
- 기독교적 사랑이란?
- 언더우드 가의 헌신
에필로그
프롤로그
교수님 조교님. 안녕하세요. 저는 2020학년도 1학기 수업을 함께한 사회학과 OOO이라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강의에도 불구하고 저희 학생들을 위하여 항상 최고의 수업을 위해 힘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한 학기였지만 덕분에 제가 가진 스무 살의 고민들에 대해서 조금씩 해답을 찾아간 것 같습니다. 이번 기말 대체 과제 수업 노트를 통해 제가 한 학기 동안 고민한 문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주제들에 대해 교수님이나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눠보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적어서 아쉽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수업 자료에서 저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더 나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답을 찾고 싶다고 적어놨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고자 세운 목표 두 가지가 있었는데요. 하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목표를 세우고 점검하기, 다른 하나는 4 복음서를 읽고 예수의 대한 제 생각 적기였습니다. 두 가지 목표를 다 확실하게 이루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하하..). 다만 이 주제에 대해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고민하고, 책도 찾아보고, 글도 써봤기 때문에 반쯤은 성공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교수님 조교님이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해주신 만큼 저도 최선을 다해서 수업 노트를 작성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이 인생에 부여한 의미는 허구에 불과한가?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미래의 역사)’를 읽고
역사학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발 하라리는 책 ‘호모 데우스’에서 AI시대의 도래 이후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미래에 대해 그려냅니다. AI는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존재가 되어 중요한 결정들을 조언해줍니다. AI는 점점 인간의 선택을 조언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 삶의 여러 공적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결국 주체적인 사고능력을 인정받은 AI는 인간과 동등한 선택의 권리를 가진 주권자가 됩니다.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인간의 삶에 필연적으로 주어지는 ‘선택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AI가, 오히려 인간을 자율적인 선택으로부터 소외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하는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고전적인 명제를 해체함으로써 AI가 발전을 거듭한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이 인상 깊었습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판단한 대로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지녔기에 존엄하며,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일궈 나간다는 근대의 ‘자유주의’ 사상이 허구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럼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최신 생명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생물학적 화학적 법칙에 지배받는 유기체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지니기에 우리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파란 차보다 빨간 차를 선호하고, 오른쪽 길을 가기보다 왼쪽 길을 선택하기도 하며, 어떤 행동은 좋다고 생각하고 어떤 행동은 나쁘다고 생각하기에 좋은 행동을 택합니다. 이런 결정은 오직 나의 ‘내면의 목소리’이자 내 속의 자아가 말한 바에 따른 것이며, 이는 다른 동물들의 본능과는 구분된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본능에만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죠.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최신의 생물학적 연구결과들은 이런 우리의 일반적 상식을 무너뜨립니다. 생물학은 우리가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냐’에 주목하기보단 애초에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욕망이 생성되었는지’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애초에 왜 파란 차보다 빨간 차를 선호할까요? 왜 오른쪽 길 대신 왼쪽 길을 좋아하고, 왜 어떤 행동은 좋다고 생각할까요? 생물학자들은 이런 우리의 욕망은 뇌 속의 생화학적 신호들이 무작위적으로 그리고 결정론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로봇 쥐 실험인데요. 과학자들은 쥐의 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쥐에게 쾌락을 주는 보상 영역을 발견하고 이 영역에 전극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쥐에게 특정 행동을 하면 쾌락을 주는 방식으로 훈련을 시켜 쥐를 조종할 수 있는 리모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쥐에게 왼쪽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던 지, 사다리를 타게 만든다 던 지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이죠.
‘살아있는 동물을 인간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비윤리적인 일인가’라 생각한 동물 보호론자들은 이런 연구를 진행한 교수진들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구진들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리모컨을 누르면 “쥐는 왼쪽으로 움직이고 싶어 지기 때문에 쥐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따라 왼쪽으로 움직일 뿐이다.” 즉, 오히려 쥐는 그 순간 자신의 쾌락이 향하는 바에 따라 행한 것이므로, 비윤리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쥐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 즉 자신의 뇌가 쾌락을 느끼는 바에 따라 왼쪽으로 움직였고, 사다리를 탔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이런 쥐가 ‘나에겐 자유의지가 있어, 봐 바! 나는 원할 때 이렇게 왼쪽으로 움직일 수도, 사다리도 탈 수 있지!’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뇌가 일으킨 무작위적인 생화학적 신호에 의해 우리의 욕망이 생성된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 자유의지를 지녔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우리 삶의 리모컨을 쥔 존재들일까요? 윤리적 제약 때문에 연구자들은 뇌 질환을 겪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특별한 상황에서만 인간의 뇌에 전극을 이식하는데, 이때 진행된 실험들 역시 인간도 쥐처럼 뇌의 적소를 자극해 사랑, 분노, 두려움과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일으키거나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의 생화학적 법칙의 작동 원리, 즉 그러한 알고리즘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리모컨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방식으로 최신 생명과학의 연구들은 인간도 해독할 수 있는 하나의 알고리즘에 불과함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유기체의 생화학적 비밀들을 풀어나간다면, 즉 그 알고리즘을 해독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AI는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아는’ 존재가 되어 우리 인간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은행계좌, 이메일, SNS 좋아요 기록, 심지어는 우리도 정확히 감지하지 못하는 은밀한 심장박동, 혈당 수치까지. 하나하나가 ‘데이터화’된 우리의 일상을 전방위적으로 수집 및 분석하는 AI는 적절한 알고리즘을 거쳐 사람들의 의사결정 과정에 도움을 주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어떤 영화를 볼지, 어디서 휴가를 보낼지를 추천하겠지만, 발전을 거쳐 우리가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고, 어떤 일자리를 구할 것인지, 심지어 누구와 만나고 결혼할지 조언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사실 제가 집중하고 싶었던 포인트는 이렇게 자유의지를 잃은 인간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생각입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간에게는 애초에 단 하나의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고, 뇌의 생화학적 기제들이 그저 한 순간의 경험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경험은 왜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르며 어떠한 목적이란 없이, 다만 결정론적으로 혹은 무작위적으로 일어난다. 다만 인간은 그러한 경험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일종의 ‘이야기하는 자아’를 지니므로, 이를 통해 자신들을 둘러싼 사건과 경험을 납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일지라도,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과연 무신론자다운 그의 주장이었고,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 삶을 둘러싼 사건들을 해석하는 각자의 방식은 사실 무작위적인 생화학적 신호의 부산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하는 자아’를 통해 인생을 줄거리를 지닌 하나의 영화로 인식합니다. 그 영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액션 영화일 수도, 로맨스 영화일 수도 있지만 어떤 영화든 간에 그 줄거리는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고통을 더 나은 삶을 향한 시련으로 이해할 수도, 다른 사람은 그저 자신의 인생에 주어진 불행으로 여길 수 있는 데 이 차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그 고통을 포장하든, 그 고통은 실재하는 반면 그 포장지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2페이지나 할애했지만, 사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수업노트를 관통하는 주제를 떠올렸습니다. 그럼 인간이 ‘인생의 의미’,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집합이 지어낸 허구적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왜 어떤 인간은 자기만의 장르를 갖고 줄거리에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시키는 것인가요? 허구임에도, 왜 어떤 이야기는 모두가 인정하는, 더 나은 가치를 지닌 이야기로 인식될까요? 그중에서도 왜 기독교의 윤리는 모두가 인정하는 고전으로서 인식되어 수천 년을 넘게 이어져 현대에 까지 인간의 삶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일까요?
물론 상당히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일 수 있겠지만, 저에겐 사뭇 중요한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만약 인간의 의미 체계에 대한 믿음이 허구일지라도, ‘그럼에도’, 저는 인간은 의미를 찾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의미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고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 인류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의 수업노트의 목표는, ‘인간이 의미를 찾고 행하는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를 주장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제가 생각해도 조금 허무맹랑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에 대해 제가 한 학기 동안 고민해본 흔적을 남기고자 합니다.
의미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
이런 제 질문에 방향성을 준 것은 바로 3주 차 ‘삶의 의미 추구와 종교’에서 다룬 빅터 프랭클의 주장이었습니다. 강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다루면서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심리치료 도구로서 ‘의미 요법’을 발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주장을 소개합니다. 그는 저서 ‘죽음의 수용소’와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통해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데요.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freedom of will)
어떤 상황들 그 자체를 결정하지 못할 경우라도,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지는 결정할 자유가 있다.
인간에게는 의미를 찾는 의지가 있다. (will to meaning)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의미를 성취하려는 본래의 관심이 좌절되었을 경우에 돈 권력 쾌락 같은 다른 것으로 이루지 못한 의미를 보상받으려 한다.
삶은 유일무이한 의미를 지닌다. (meaning to life)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올바른 해답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고, 그 상황의 의미를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의미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된다.
저는 그의 주장에서 유발 하라리와는 다른 차원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의미란 인간 자기 자신이 고안해서 만들어내거나, 자기 자신을 투과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미는 인간의 삶을 넘어서 인간 자신 이상의 초주관적인 성격을 가지며, 이는 현실 자체가 가진 객관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600과 GOD를 헷갈린 한 종교 관련 강연장에서의 상황이 예시로 나옵니다. 사회자는 ‘교수님은 600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적힌 질문지를 받는데, 사회자는 이를 잘못된 질문지라고 생각하였지만, 우연히 그 질문지를 발견한 강연자는 그 글자가 GOD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강연장 안에서 그 글자는 600으로도 될 수 있고, GOD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GOD의 의미로만 이해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예시의 연장선에서 우리 삶에 벌어지는 사건들 또한 여러 방식으로 해석되지만, 그에 따르면 우리는 유일무이한 그 의미에 부합하는 ‘그’ 해석 방식을 찾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를 찾아가는 데에는 의미를 찾는 일정한 직관적 능력이 필요하고, 이러한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임무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듣고 ‘죽음의 수용소’랑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주문했습니다. 둘 다 한 번씩 훑어봤는데,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단번에 보아도 너무 어려워 보여서 ‘죽음의 수용소’를 읽어보았습니다. 책을 읽으니 그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작가 본인이 수용소 체험자의 시각에서 적은 글입니다. 그가 보고 느낀 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쓴 이 글에서 저는 프랭클이 말하고자 한 바를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인간은 자기의 태도를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 부분입니다. 프랭클은 아무리 나치 군대가 신체적인 자유를 앗아가더라도, 자신의 정신적인 자유를 앗아갈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즉,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아우슈비츠에서의 강제 노역 생활과 같이 인류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리고 그 상황을 자기 의지대로 바꿀 수 없는 경우에도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바로 자기의 태도를 결정할 자유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주어진 이 마지막 자유를 실현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삶의 유일무이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또 ‘의미가 현실 자체의 객관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분의 의미입니다. 프랭클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단순히 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결정한 태도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즉, 자신이 추구한 의미가 자신의 생존과 죽음이라는 현실 자체의 객관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죠. 즉, 애초에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에서 결과의 효용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어떤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희망을 잃었다고 생각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도 존재했습니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왜 자살을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들 정도의 열악한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것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생존본능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특히 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 형을 받아 치욕 속에서 죽은 예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12주 차 <예수, 그는 누구인가> 강의에서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가 너무나도 치욕스러운 형벌에 의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분명 추종자들로 하여금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특히 마가 복음서는 그러한 예수의 죽음은 사실 비밀리에 진행된, 이미 예정된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는 본인이 치욕스럽게 죽으며 추종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상황에 놓일 것을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구원자와 그의 수치스러운 수난이라는 역설적인 신학관을 마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예수 또한 인간으로서 ‘왜 나에게 일어나야만 했나’라는 고민이 들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샤갈의 하얀 십자가형은 이런 예수의 고난과 유대인의 고통을 동일시하는데요. 저는 시련을 맞닥뜨린 예수와 유대인들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들의 시련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시련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절망적인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없습니다.
저는 예수와 빅터 프랭클이 자기 앞에 주어진 시련을 대하는 태도에서 바로 의미를 발견하는 행위가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기력함, 좌절감, 절망감, 포기하고 싶은 마음, 자신의 가족들도 다 죽었을 것이라는 데에서 오는 슬픔 등, 프랭클이 자살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데에는, 인간이라면 어떤 상황에서 올바른 해답을 찾아낼 책임이 있다는 그 사실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 상황에 놓인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히 자신의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의미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유발 하라리의 주장으로 돌아와 봅시다. 인간은 생화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 알고리즘에 불과하며, 우리는 순간의 경험에 대해 본인이 부여하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프랭클이 자신의 삶에 부여한 의미는 헛소리일 뿐입니다. 헐벗고, 굶주렸으며, 가족들은 죽은 것이 분명하며, 두 발은 동상으로 인해 괴사 당하기 직전이며, 수치심과 좌절이 가득한 그는 생화학적으로 ‘죽으면 편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겠죠. 만약 그 시절 AI가 존재했다면, 그의 호르몬의 변화, 심장박동,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을 가능성 등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프랭클을 분석한 AI는 효용을 위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조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프랭클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인간은 생화학적 기제가 관여하는 감정과 욕구로 환원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 그로부터 느껴지는 일시적, 순간적인 감정을 넘어서 스스로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고, 의미를 추구하겠다는 책임의식을 지닌 존재입니다. 인류의 정수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성경’이 언약(Covenent) 혹은 계약(testament)인 데에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6주 차 강의자료 <기독교의 경전: 성서가 우리 손에 오기까지(2)>, 11주 차 강의자료 <이집트 탈출기: 해방과 구원의 이야기>는 각각 토라 준수와 복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신명기, 그리고 출애굽 이후 히브리 백성들의 새로운 정체성이 된 토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인들에게 자신들과 야훼와의 관계에 있어서 토라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야훼의 절대적인 권능을 통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히브리인들이 ‘야훼의 거룩한 백성이 되겠느라’ 다짐하며 가장 먼저 한 것은 십계명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토라를 지키고 어김을 반복하며, 야훼의 축복을 받기도 버림받기도 하는데, 이 과정이 사실 구약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약성서는 ‘너는 이 약속을 지킬 것이냐 지키지 않을 것이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광야의 땅에 살아가는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을 지킬 현실적인 이유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오랜 시간 만들어놓은 계율들은 희년과 안식년과 같이 지금의 기준으로 비추어 볼 때도 정말 진보적인 것들이 많은데, 그 오래전 과거에 이런 계율을 지키며 구분되어 사는 것은 엄청난 제약일 것입니다. 이러한 계율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절대시 하며 지키는 행위는 분명히 자신이 의미를 추구해 나가겠다는 책임을 지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나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
정리하자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미 체계를 통해 허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존하는 초주관적인 의미를 발견해 나갈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의미의 발견은 부정적인 상황이 개선되는 것 같이 현실 그 자체의 객관성과는 독립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는 인간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입니다. 의미의 발견은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이 세운 원칙, 자신이 세운 언약을 준수하는 태도를 지닐 때에 이루어집니다. 저 또한 제게 주어진 인생 속에서 올바른 해답을 찾을 책임이 있음 깨닫자, 그다음은 저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적 사랑이란?
제가 먼저 주목한 것은 ‘사랑’의 가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올해 4월 즈음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연애를 시작하기 앞서 사랑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해야 더 잘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지하게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은데, 막상 제가 제 스스로 사랑이란 과연 뭔지에 대해 조금 혼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은 마치 첫사랑처럼 강렬하고, 한눈에 보면 딱 ‘이 사람이다’라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격정적인 것일까요?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의 동요인가요? 사랑은 성적인 관계 맺음인가요? 첫눈에 반한 짝사랑을 오래 해 본 경험, 일시적으로 ‘한번 사귀어 보고 싶어서’ 큰 호감은 없지만 사귀어본 경험이 있는 저로써는 새로 연애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또 이번엔 제가 정말 잘 대해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자, 진정한 사랑이 뭔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조원들과 ‘성서와 성’ 발표를 준비하며 ‘성’과 관련된 고민들을 다루며 기독교는 ‘성’과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특히 ‘사랑’과 ‘음욕’의 상태의 비교를 통해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적 욕구 또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 중 하나로 인정합니다. 다만 그러한 성적 욕구가 남을 소유하고 대상화하려는 마음의 상태인 ‘음욕’으로 이어진다면 이를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간음치 말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라는 마태복음 5장 27절에서 29절의 말씀은 이런 음욕의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음욕을 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튀메오’ 즉 ‘남의 재물을 탐내다’라는 소유욕을 지닌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음욕을 품고 타인을 바라보는 자는, 간음한 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특히 ‘음욕’에 빠진 자는, 그의 오른쪽 눈을 빼버린다 할지라도 왼쪽 눈으로 자신의 음욕 어린 시선을 보낼 사람입니다. 즉 그만큼 음욕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반면 복음서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성경적 '사랑'은 ‘음욕'과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사랑이란 오직 상대를 향한 궁극적인 책임과 절대적인 희생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모습은 그런 기독교적 사랑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주 차 <예수, 그는 누구인가> 강의에서 다루듯, 바울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한 제물적 죽음입니다. 대리적, 희생적, 대속의 죽음으로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이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 이것이 예수가 보여준 사랑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인들을 향한 야훼의 사랑도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야훼는 히브리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숭고한 사랑을 베푼 ‘친절’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히브리인들이 죄악에 빠지면 벌을 주고, 또 자신을 찬양하며 토라를 지키면 축복을 더하는, ‘아버지’ 하나님에 가까웠죠. 즉,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치 모든 걸 오냐오냐하는 친절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가 잘되길 원하는 아버지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무조건적 포용과 자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에게 더 나은 것을 보고 느끼고 듣게 끔 하고픈 질투와 분노와 같은 마음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남녀가 서로 진정으로 존재 대 존재로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길 바란 것 같습니다. 욕구가 아닌 사랑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진정한 soul mate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 관계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기쁨, 순간적인 성적 쾌락보다 더 강렬하고 지속적인 기쁨을 선사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어주겠다’는 책임을 다하고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도 제 연애를 앞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어렴풋이 감이 잡혔습니다. 서로에게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주겠다는 책임을 다하는 것.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분노, 흥분, 시기심으로부터 등을 돌려, 연애 관계라는 하나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것. 상대방을 향한 끊임없는 헌신과 희생. 그리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신의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사랑에는 결과가 없고 이러한 사랑하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더우드 가의 헌신
제가 두 번째로 떠올린 가치는 9주 차와 10주 차 <연세대학교의 역사와 기독교(1)>과 <연세대학교의 역사와 기독교(2)>에 걸쳐서 언더우드 가가 보여준 헌신의 가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교사 언더우드에 관한 만화책을 너무 좋아해서 여러 번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적 우상과도 같았던 언더우드가 설립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데에는 어떤 모종의 이끌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현역 때 정시로 너무 운이 좋게 들어온 연세대학교에 만족하지 않고 작년에 준비한 반수가 실패로 끝났을 때, 연세대학교는 저에게 너무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저와 연대의 관계, 그 사이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조선의 땅에 홀로 선교사 신분으로 건너와 교육과 의술, 사회사업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어려웠던 조선인들을 섬겼습니다. 한글 성서 번역, 사전 편찬, 찬송가 등 기타 선교 문서 출간, 신문 창간까지. 또 YMCA 조직을 창설하고, 77개의 교회를 설립하여 조선 땅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힘을 썼습니다. 또 선교활동 및 교육과 의료 지원 사업을 위해 재정 및 인력 확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설립한 연희전문학교는 총칙 제2조에 “본 법인은 기독교 주의에 의하여 연희전문학교를 설립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연희전문학교는 조선교육령에 따라 전문교육을 행하는 것으로 한다”라고 적어놓아 기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기독교 정신을 기반으로, 채플과 성서를 교육과정으로 편성하였고, 이는 지금 19학번인 제가 듣는 성서와 기독교 수업으로 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언더우드 가족의 4대의 걸친 헌신은 연세대학교 생과대 뒤에 있는 언더우드 기념관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직접 찾아가 본 언더우드 기념관은 아쉽게도 코로나로 인해 닫혀 있었습니다. 임시 휴관 기간이 끝나면 꼭 찾아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녹화 강의를 들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원한경 박사가 자신이 가르친 연희전문학교의 좌익 학생들에 의해 자신의 아내를 잃고 충격에 빠졌음에도 학생들에게 사형만을 면해줄 것을 부탁한 부분이었습니다. 충격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 전쟁 발발하자 구호활동을 이어가다 부산에서 돌아가신 그의 인생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을 제가 더 먼저 알아 뵙고, 감사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게 까지 느껴졌습니다.
교수님께서 녹화 강의 마지막 부분에 말씀하셨듯, 저도 연세대학교 역사의 한 부분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에 걸맞은 학생이 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앞선 선배님들, 선생님들이 걸어가신 헌신과 희생의 삶, 진리를 추구하는 전통과 계승에 참여하여, 연세대학교의 자부심이 되어야겠지요.
에필로그
결국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 학기 동안 고민하며 제가 얻은 결론은 의미란 자신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일시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의 약속,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겠다’, ‘더 나은 삶을 살겠다’와 같은 하나님과 나와의 약속은 현실적으로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그것을 지키는 것. 어떠한 현실적인 이익과 관계없이, 지금 내 상황과 일시적 감정이 날 흔들더라도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결국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제 스스로와 약속을 하려 합니다. 사랑의 과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상대방을 대하고 궁극적으로 책임과 헌신을 다할 것. 그리고 언더우드와 같이 내가 가진 사랑을 타인에게 나누며, 이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조금이라도 줄여나가기 위해 아주 보잘것없는 것부터 노력해 나가는 것.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제 여정은 현재 진행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