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risee May 31. 2024

소녀는 왜 불도저에 올랐을까

영화를 좋아한다.


책만큼이나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

그리고 등장인물의 표정과 행동이 보여주는 또 다른 매력이 있기에 종종 영화관을, 영화를 찾곤 한다.


이제는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각종 ott를 통해 수많은 영화를 접할 수 있으니 영화를 취미로 하기에 꽤 좋은 환경이 갖추어진 셈이다.


그중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영화 한 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불도저와 소녀라는 다소 이질적인 소재가 공존하는 영화.


제목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게 된 이 영화는 생각보다 깊은 여운을 선사했다.


그 여운은 약간의 통쾌함, 그리고 짙은 씁쓸함의 맛이었다.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


주인공 혜영은 왜 불도저에 올라야만 했을까?




소녀가 불도저에 올라탄 이유


영화는 주인공 '혜영'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팔에는 커다란 문신을 새기고, 두려울 것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혜영.


혜영은 경마를 좋아하는 철없는 중국집 사장님인 아버지, 그리고 어린 동생과 함께 살아간다. 


조금은 팍팍하고 지난한 시간일지언정 그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삶의 궤도를 그려가며, 아주 가끔은 소박한 행복을 찾기도 한다.


동생을 씻겨주며 문득 벌이는 물장난과 같은 것들이 혜영을 웃게 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삶에 아버지의 사고, 그로 인해 짊어지게 된 거액의 합의금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운다.


설상가상으로 삶의 터전인 중국집까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가게 된 상황 앞에 소녀 혜영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는 아마도 그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듯하다.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소녀'  혜영이 과연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말이다.


어떤 측면에서, 아니 영화가 상영되는 대부분 혜영은 무력감을 맛본다.


자신의 아버지를 분노하게 한, 그러나 곧 무력하게 한 '최 회장' 앞에서.


타인, 특히 본인보다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나 연민과 같은 감정 따위 없는 최 회장을 마주하며 혜영은 벽을 마주친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혜영이 느껴야 했던 힘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좌절과 쓰라린 모욕은 철옹성과 같은 벽 그 자체였던 것이다.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그 벽, 아버지도 본인도 무너뜨리지 못한 그 벽을 바라보며 혜영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혜영이 택한 방법은 실로 '영화 속' 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절박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혜영은 불도저에 올라탄다.


그리고 그 불도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최사장의 집.


말 그대로 '불도저에 올라탄 소녀' 혜영은 그렇게 최사장의 집을 무너뜨린다.


마치 자신의 앞에 둘러싼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듯이 말이다.


당연히 영화임에 가능한 결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주는 통쾌함과 카타르시스는 이 영화의 백미이자,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렬함을 선사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꼭대기를 향해 던진 돌 : 현실은?


혜영은 불도저를 몰고 그 단단한 벽을 부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처럼,  어딘가를 향해 소리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그 벽이 부수어졌을 때 혜영의 표정에는 일말의 승리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과를 들을 수 없었다는 씁쓸함이 공존한다.


불도저 사건 이후 최사장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최사장은 또다시, 혜영과 불도저는 잠깐의 해프닝이었던  듯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영화에서 최사장은 큰돈을 투자에 가게를 증축한 혜영의 아버지에게 단 2년 만에 가게를 비우라고 통보한다.


이유를 묻는 혜영의 아버지에게 돌아온 답은 '내 땅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한 마디였다


자본주의가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이 한 마디에 처절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는 결국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선사한 자유이자, 누군가를 도려낼 수 있는 양날의 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군가에게는 잔인함과 무정함을 감추는 방패가 되어주고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높아지기만 하는 단단한 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리라.


영화 속 혜영은 기꺼이 그 벽을 허문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그렇게 혜영은 최사장의 견고한 세상에 하나의 파장을 몰고 오는 데 성공한다.


혜영은 작은 성공을 맛보았다.


그 성공을 그려낸 장면은 마치 중력을 거슬러 꼭대기로 돌을 던지는 모습과도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현실에서 권력, 또는 자본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하게 패배하는 수많은 '혜영'과 '혜영의 아버지' 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돌은 좀처럼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다.


꼭대기를 향해 던져진 돌은 되려 돌을 던진 이에게 상처를 남기기 부지기수인 것이다.


하나의 파장을 몰고 왔다는 점, 중력을 거스르고 단단한 벽을 부수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현실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다만 영화와 현실의 닮은 점을 꼽자면, 결국 그 파장은 다시 잔잔한 물결 속으로 사라지리라는 것.


현실 속의 우리들은 때로 무력했던 혜영의 아버지처럼  분노와 절망을 삼키곤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일종의 벽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그 벽을 허물 수 있는 불도저, 그것이 아니라면 그 견고함에 작은 흠이라도 낼 수 있는 중력을 거스르는 돌이 우리에게는 있을까?


혜영과 혜영의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좌절과 절망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통쾌함과 씁쓸함이 버무려진 감정을 맛보며 해결되지 못할 질문을 던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2.11.02 (수) 독서기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