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도 전통주를 섹시하게 마시고 싶은 세 여자의 술 투어 '우술까'
선홍빛 살코기와 하얀색 지방, 침샘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비율. 뿌연 재가 내려앉은 참숯 위에서 지글지글 아우성을 쳐대며, 점점 더 노릇하게 맛있는 모습으로 익어갈 테지. 이 순간, 이글거리는 불과 완벽한 타이밍, 우리를 축복할 술 한 잔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어. '이베리코'는 분명 맛있을 거야.
소고기 얘기인줄 알겠지만, 돼지고기이다. '이베리코'는 스페인에서 자란 흑돼지이다. '소고기 못지않은 돼지고기'라고 불릴 만큼 육색과 향이 짙은 편이며, 두툼한 비계의 쫄깃쫄깃한 식감과 입 안 가득 팡팡 터지는 풍부한 육즙이 특징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돼지고기 구이집들도 이베리코를 적극적으로 들여 놓는 추세란다.
삼겹살 천국 대한민국에서 물 건너온 돼지고기가 인기라는데. 우술까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돼지고기계의 라이징 스타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각자 이베리코와 어울릴만한 전통주도 챙겼고, 이베리코에 대해 속속들이 파헤쳐줄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문정훈 교수도 함께했다. 모임장소는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경성제일식당', 이베리코 흑돼지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당이다.
고기 먹기 딱 좋은 분위기, 코를 자극하는 숯불 냄새.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주섬주섬 각자가 챙겨온 술부터 꺼냈다. 모아보니 총 4종. 신쏘는 배상면주가의 '산사춘', 박언니는 국순당의 '려'와 오미나라 '문경바람', 나는 제주샘주의 '고소리술'을 준비했다. 각자가 이베리코 돼지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해서 준비한 술들이다. 모두 꺼내 놓고 나니 자기가 가져온 술을 설명하고 싶어 안달들이다. 워워, 릴렉스.
가장 먼저 문 교수에게 이베리코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고 하니, "단언컨대 맛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6개월 된 110kg의 돼지를 잡는 반면, 이베리코는 2년정도 된 150-170kg이 나가는 더 성숙한 돼지를 잡아 육향이 더 짙다"고 말했다.
점점 더 기대감 고조. 돼지고기니까 두툼한 삼겹살을 기대했는데, 웬걸 삼겹살을 포함한 가지각색 7종의 다양한 부위가 눈앞에 펼쳐졌다. 문 교수에게 "이게 다 돼지고기에요?"라고 물으니, 문 교수는 "이베리코는 삼겹살 부위가 대부분이 지방이기 때문에 맛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라며, "덕분에 목살이나 항정살, 갈빗살, 치맛살 등 돼지고기의 다른 부위를 주로 먹습니다"고 답했다. 돼지고기니까 당연히 삼겹살을 먹는 줄 알았던 무식쟁이가 여기 있다.
페어링 첫 타자는 바로 가슴살. 스페인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따로 가슴살을 분리하지 않는다. 이베리코를 소개해주시는 문 교수 역시 자주 먹는 부위가 아니라며, 은근 기대된다고 까지 말씀하셨다. 괜히 더 두근두근. 보기에는 굉장히 퍽퍽해 보이는데, 입안에 넣으면 기름기를 머금은 육즙이 먼저 입맛을 돋우고, 씹는 순간 굉장히 부드럽다. 문 교수님을 시작으로, 박언니와 나도 부드럽고 달콤하게 끝나는 국순당의 '려'를 꼽았다.
국순당 '려'는 여주산 고구마와 쌀을 원료로 빚은 알코올 도수 25도의 증류식 소주이다. 수확한지 7일 이내의 고구마를 사용하며, 쓴맛이 날 수 있는 고구마의 끝부분은 잘라내고 술을 빚는다. 고구마 특유의 향이 살아있다.
특히 이 술은 박언니가 선택했는데, 일본 규슈지역 가고시마현 특산물에서 착안했단다. 가고시마현은 흑돼지와 고구마가 유명한 지역으로, 박언니는 이곳에서 먹었던 돼지고기 샤브샤브와 고구마소주의 조화를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번 매칭 역시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진행을 했다고. 고구마 특유의 달콤함이 고스란히 고기를 감싸 안는다. 야들야들 부드럽다.
레드미트는 이름부터 처음 듣는 생소한 부위다. 알고 보니 문 교수님 역시 처음 맛보시는 부위란다. 삼겹살을 떼어낼 때 같이 붙어 나오는 부위 중 하나로, 국내에서 레드미트를 따로 취급하지는 않고, 주로 갈아서 육가공품으로 사용한다. 전문가도 처음 맛보는 걸 이렇게 먹어보다니, 호강이다! 호강!
문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이거야 말로 훈제 햄 맛" 레드미트는 돼지고기에서 느낄 수 없는 식감을 가졌다. 지방이 거의 없고, 다진 고기를 씹는 것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는 살코기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는 딱 제주샘주의 '고소리술'. 세 여자 모두 만장일치로 선택했다. '고소리술' 특유의 단맛은 입안을 부드럽게 만들어 레드미트 본연의 식감을 그대로 살려준다. 또, 자칫 느낄 할 수도 있는 고기 기름기를 40도라는 높은 도수의 알코올이 싹 잡아주어 입안 전체를 개운하게 만든다. 환상적인 조합이다.
고려시대 때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개성, 안동, 제주에 증류기법이 전해진다. 이후 증류주가 생산이 되는데, 그중 제주도 증류주가 바로 '고소리술'이다. '오메기술'을 증류하여 만들어지는 술로, 소주를 내리는 도구를 '소줏고리'라고 하는데 제주도에서는 이 소줏고리를 '고소리'라고 부르기 때문에 '고소리술'이란 이름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항정살과 가브리살. 그나마 돼지고기 부위 중에서는 접해봤던 부위들이다. 계속해서 야채 하나, 김치 한 조각도 없이 고기만 폭풍 흡입했던 탓일까. 슬슬 느끼하기 시작했다. 조금 쉬려고 했더니 문 교수님의 결정타 "벌써 느끼하면 참을성 차이입니다"라는 말. 역시 배우신 분이다. 그러더니 상큼하게 ‘산사춘’ 한잔까지 마셔주신다. 캭. 멋지다, 멋져.
같은 맥락으로 오미나라의 '문경바람'도 잘 어울린다. 이 술은 충북 문경의 사과로 사과와인을 만들어 그 술을 증류, 다시 백자에 숙성한 브랜디이다. 특히 목 넘김이 부드럽고 사과향이 가득가득하고, 피니쉬가 긴 술이다. 이베리코의 느끼한 부위를 먹었을 때 문경바람의 사과향이 바람처럼 입안으로 퍼져 느끼함을 잡아준다. 사실 '문경바람'은 이날 나온 모든 부위와 잘 어울렸는데 이 술 자체가 고기를 먹기 위해 나온 술이 아닌가 싶다.
이베리코와 전통주의 만남, 도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고? 아, 이 얼마나 치명적이고, 유혹적인 맛인지 먹어봐야지 알 텐데. 그저 고기 한 점, 술 한 잔… 온전히 느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잠자코 먹어봐야 알 수 있다. 으, 딸리는 표현력. 진작 기가 막힌 표현 하나 배워놔둘걸.
<세 여자는 누구?>
장기자: 양조장 취재 몇 번 다녀온 거로 '나 술 좀 알아.' 폼 좀 잡다가 큰코다친 애송이 기자이다. 목표는 프로 애주가! 전통주 공부를 핑계로 두 여자를 살살 꼬셔 '우술까(우리_술 한잔 할까?)'를 기획, 신나게 술 투어를 다니고 있다.
신쏘: 듣기에도 생소한 전통주 소믈리에이다. 맨날 전통주만 마실 것 같지만, 주량에 대해 물어보니 '맥주 다섯 잔'이라고 얘기하는 우리의 드링킹 요정. 단순히 술이 좋아 시작한 게 눈 떠보니 업으로 삼고 있다.
박언니: 자타공인 애주가. 술 좋아하는 고주망태 집안에서 태어나 '난 절대 술은 안 마실 거야'라며 주문처럼 다짐했다지만, 막상 성인이 되어서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것이 술이다. 느지막하게 열공모드에 돌입, 얼마 전에는 직접 일본으로 날아가 사케 소믈리에 자격증도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