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謙遜)''이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남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정의된다.
하지만 이 문장을 곱씹어 보면, 단순히 고개를 숙이고,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겸손은, 내 잘남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남이 절대적일 수 없음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뛰어난 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게 타인의 못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은 항상 있고,
또 내가 잘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남들은 기가 막히게 해낸다.
겸손은 이 단순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누구나 노력한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항상 말한다.
''노력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에너지, 같은 실력이라도 누구는 뜨고 누구는 사라진다.
이때 등장하는 단어가 운이다.
사주든, 환경이든, 배경이든.
같은 노력을 해도,
누구는 '노력 덕분에' 성공하고,
누구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다.
예를 들어 쌍둥이를 생각해 보자.
같은 유전,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들조차도 다른 삶을 산다.
운이란 그런 것이다.
공평하게 시작하는 사람도, 결국은 각기 다른 꽃을 피운다.
운이 좋을 때, 사람은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건 전부 내 능력이야.''
물론 아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
즉, 능력 있고,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
그들은 준비된 상태에서 운을 만나서 날아오른다.
문제는, 운이 나빠졌을 때다.
과거엔 그냥 넘어갔던 작은 실수들이,
이제는 큰 비난이 된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깔보거나,
함부로 대하던 태도들이
그대로 되돌아온다.
이럴 때 겸손했던 사람은 비교적 조용히 내려온다.
그러나 오만했던 사람은 무너질 때,
다 부서진다.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때 가장이 되어 꿈을 포기해야 했던 사람.
성실하게 살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아 늘 한계에 부딪힌 사람.
그 사람들은 못난 게 아니다.
그저, 더디게 피는 중일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닥에서,
그릇을 키우는 중이다.
세상은 그 ''버티는 시간''을 무가치하게 보지만,
진짜 단단한 인간은 그 고통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사람은 A의 삶만 살지 않는다.
가끔은 B의 삶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경쟁, 승리, 성취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 실패, 상실, 수용의 삶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조용히 살아온 사람이
폭발적으로 빛나는 시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건,
자신의 과거 삶의 방식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태도다.
"나는 이래서 이 방식만이 맞아."
"저런 삶은 나랑 맞지 않아."
이런 말이 스스로를 옭아맨다.
김성근 감독을 보자.
그의 방식은 시대와 충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뚝심과 철학은 ‘비열함’이나 ‘꼼수’가 아닌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세상이 변해도, 그는 변치 않았고
지금은 더욱 사랑받는다.
문제는 '절대성'이 아니다.
문제는 '왜곡된 기준의 고집'이다.
겸손은 단순히 덕목이 아니다.
운이 꺾일 때, 나를 지켜주는 '인간의 방어막'이다.
운이 좋을 때 겸손했던 사람은
운이 꺾여도 망가지지 않는다.
반대로, 운이 좋았을 때
남을 깔보고, 오만하며,
비열하게, 남을 짓밟으면서 올라섰던 사람은
운이 꺾이기 시작하면,
그동안 깔아뭉갰던 사람들,
비열하게 남을 짓밟으면서 했던 환경,
비웃었던 기준들이 모두 되돌아온다.
겸손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정확한 눈이다.
운은 절대적이지 않다.
노력도 절대적이지 않다.
삶의 방향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 잘 나가든, 힘들든, 누구든
인간이라면 겸손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운이 좋을 때 자만하지 말 것.
운이 나쁠 때 무너졌다고 믿지 말 것.
절대적인 길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당신이
어떤 삶의 위치에 있든,
당신의 그릇은 계속 자라고 있다.
그러니 고개를 들고, 겸손하게 꾸준히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