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간과한 사상들의 한계(1편)

by Woo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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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냥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상가들이 “좋은 사회는 무엇인가”를 물었고, 그 답이 제도와 법, 문화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철학 속에서 만들어진 세상 위를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그들의 사상은 지금 이 세계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현실을 간과한 채, 오래된 틀로 우리를 묶고 있는가?


플라톤 ― 철인이 다스려야 한다?

플라톤은 지혜로운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철인정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에도 전문가 집단, 엘리트주의의 논리는 플라톤의 자취다.


하지만 철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돈이 많다고, 박사가 있다고, 권력의 자리에 있다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현실의 엘리트는 권력에 쉽게 취한다. 교

육도 시민을 깨운다기보다, 잘 길들여진 인재를 만들 때가 많다.


나는 플라톤을 이렇게 비판한다.

지혜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 지혜는 권력의 하수인이 된다.


공자 ― 도덕과 예의로 다스려야 한다?

공자는 말했다.

사람이 도덕과 예의를 지키면 가정이 바르고, 사회가 바르고, 나라가 바를 수 있다고.

그 말은 동아시아 문화에 깊이 스며들어, 효·위계·관계 중심의 질서를 만들었다.

과거 시험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시험이 인생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 수양은 의식주가 최소한 안정된 위에서만 가능하다.

가난과 불안 속에서 도덕을 말하는 건 공허하다.

시험 제도 역시 덕 있는 사람을 뽑는 길이 아니라,

암기에 능한 사람을 뽑는 장치로 변했다.


나는 공자를 이렇게 비판한다.

수양은 의미 있지만, 그것을 구조적 안정 없이 요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애덤 스미스 ―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만,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이익을 얻는다.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무역과 자본주의 경제의 뼈대가 됐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탐욕과 독점, 패권으로 움직인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말하지만, 패권 유지를 위해 압박과 제재 등을 일삼는다.


만약 스미스 말대로라면, 미국이 부도가 나면 다른 나라가 미국을 나눠 사고 미국은 사라져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권력욕이 시장의 질서를 비웃는다.


나는 스미스를 이렇게 비판한다.

시장을 믿으라는 말은, 강자의 힘을 포장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마르크스 ― 계급투쟁?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봤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싸움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했다.

그의 사상은 노동자 권리를 강화했고, 복지국가의 씨앗이 됐다.


하지만 현실의 사회주의는 권력욕에 물들어 독재로 끝났다.

중국도, 북한도, 노동자의 낙원이라기보다는 권력자의 낙원이었다.

인간을 계급으로만 나눈 분석은, 더 근본적인 욕망 돈, 권력, 지배욕을 간과했다.


나는 마르크스를 이렇게 비판한다.

역사를 움직이는 건 계급이 아니라, 더 집요한 인간의 욕망이다.


존 롤스 ― 정의란 공정함?

롤스는 말했다.

“내가 부자인지 가난한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사회 규칙을 만든다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제도가 나올 것이다.”

그의 원칙은 복지국가의 철학적 기초가 됐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사람은 이미 자신이 부자인지 가난한지 안다.

부자가 왜 약자를 도와야 하는가? 무엇을 받았기에 돌봐야 하는가?

롤스의 정의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나는 롤스를 이렇게 비판한다.

현실의 불평등은 정의가 아니라 힘의 균형으로 유지된다.


푸코 ― 권력은 스며든다

푸코는 말했다. 권력은 머리 위에서만 떨어지는 곤봉이 아니라,

‘정상’을 만들어 몸 안에 스며드는 습관이다.

그는 학교·교도소·병원 같은 제도 속에서 권력의 얼굴을 봤다.


오늘날 우리는 CCTV, 빅데이터, 플랫폼 알고리즘 속에서 살아간다.

전문가의 말은 권력이 되고, 규율은 일상이 된다.


하지만 푸코는 진단에서 멈췄다.

정상과 규율을 어떻게 균형 잡을 것인지는 말하지 못했다.

인간의 욕망과 권력욕이 왜 그 제도를 오용하는지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


나는 푸코를 이렇게 비판한다.

진단은 날카롭지만, 욕망까지 설계하는 균형이 빠졌다.


아렌트 ― 악의 평범성

아렌트는 말했다. 전체주의는 고립된 개인과 선전, 관료체제가 결합할 때 가능하다.

아이히만 재판에서 그녀는 보았다. 악은 괴물이 아니라, “나는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는 평범한 복종이었다.

오늘날 가짜뉴스와 포퓰리즘, 그리고 전쟁 범죄까지 아렌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녀의 해법은 “생각하는 시민, 함께 말하기”였다.


나는 아렌트를 이렇게 비판한다.

공론의 자유는 본질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참여에는 기본선과 보상이 필요하고, 권력에는 자동 견제 장치가 필요하다.

판을 새로 짜지 않으면, 악의 평범성은 언제든 반복된다.


하이에크 ― 시장은 자생적 질서

하이에크는 말했다. 사회의 지식은 분산돼 있으니,

가격이 그 정보를 모아 효율적 질서를 만든다.

계획경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뼈대가 되었고, 세계화의 이론적 기초가 됐다.


하지만 현실의 시장은 독점·패권·외부효과로 가격 신호가 망가진다.

기업이, 국가가, 권력욕에 따라 시장은 쉽게 왜곡된다.

결국 시장의 순수한 자생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하이에크를 이렇게 비판한다.

시장은 훌륭한 센서지만, 심판이 될 수는 없다.


아마르티아 센 ― 역량으로 보는 빈곤

센은 말했다. 빈곤은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 상태다.

교육, 건강, 정치 참여 같은 역량이 곧 자유이고, 발전이다.

그의 사상은 UN 인간개발지수, 빈곤정책, SDGs로 이어졌다.


하지만 역량을 어떻게 측정할지,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지는 모호하다.

정치 참여를 강조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이념적 세팅 속에서 자란다.

재능과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정치 참여는 때로 강제처럼 들린다.


나는 셈을 이렇게 비판한다.

역량 접근은 탁월하지만, 욕망의 다양성과 구조적 편향을 간과했다.


결론 ― 모두가 놓친 것

플라톤은 지혜를, 공자는 도덕을, 스미스는 시장을, 마르크스는 계급을, 롤스는 공정을 말했다.

푸코는 권력을, 아렌트는 민주주의를, 하이에크는 가격을, 센은 역량을 말했다.

그들의 말은 지금의 세상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으로 인간의 현실을 놓쳤다.
욕망, 권력욕, 탐욕, 비열함…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제도 속에 담지 못했다.
그래서 제도는 늘 어긋났고, 선의는 악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균형주의를 말하려 한다.

기존 사상의 장점은 취하되,

인간의 욕망까지 구조에 담아내는 새로운 길.


1. 욕망의 방향성을 설계하고,

2. 권력을 자동으로 견제하고,

3. 기본선을 보장하며,

4. AI+로봇 시대의 분배를 담아내는 제도.


그것이 선의뿐 아니라 악까지 계산한 제도,

현실의 인간을 있는 그대로 안고 가는 새로운 길이다.


그 이야기는, 2편에서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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