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여행
처음엔 단순했다.
원두 이름, 향, 맛. 기억해두고 싶었던 것들을 메모장에 간단히 적어두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철베사
– 자몽 향 / 산미 있음 / 입안 상큼’
‘콜롬비아 수프리모
– 초콜릿 / 구운 견과류 / 묵직함’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 라임 껍질 / 백차 / 재스민 / 청포도’
‘에티오피아 고티티 게이샤
– 복숭아 / 벌꿀 / 오렌지 블로섬’
‘코스타리카 라스라하스 게이샤
– 베르가못 / 로즈힙 / 달콤한 산미’
처음엔 이 향들을 잊지 않기 위한 단순한 기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옆에 이런 문장이 붙기 시작했다.
‘오늘은 마음이 좀 무거웠는데, 고티티 게이샤 향이 마음을 살짝 들어 올려줬다.’
‘라스라하스의 베르가못 향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말 없이 어깨 두드려주는 느낌.’
그날의 감정이 원두 기록 옆에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점점 커피 노트는 정보가 아니라 감정이 담긴 기록이 되었다.
오늘의 기분, 향의 인상, 그리고 내 안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까지.
나는 어느새 커피를 통해 나를 기록하고 있었다.
예전엔 ‘좋은 맛’이 기준이었다면,
이젠 ‘이 커피는 나를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가 중요해졌다.
‘기분이 들뜬 날엔 산뜻한 산미가 더 잘 어울렸다.’
‘비 오는 날엔 꽃향기와 달고나처럼 단향이 오래 남는 게 위로가 되었다.’
‘마음이 복잡한 날엔 게이샤의 복합적인 향이 감정들을 정리해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쓴 문장들은 어느새 작은 감정 지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아, 이 시기는 내가 많이 지쳐 있었구나, 이때는 향에 예민하게 반응했구나…
그런 내 모습이 은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순간에 어떤 커피를 마실까?’
누군가의 커피 노트도 있다면, 거기엔 어떤 감정이 적혀 있을까.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향에 반응하는 감정도 다를 텐데,
그걸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얼마나 따뜻할까.
커피 노트는 결국 나만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끝에서 나는 타인의 취향과 감정에 귀 기울이고 싶어졌다.
취향이란 건,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를 알고,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