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순간 눈에 들어온 건,
아직 해뜨기 전인데도 유난히 많은 차량들이었다.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이라 그런지 핸들 감각이 조금 낯설었고,
기분 좋은 긴장과 미묘한 어색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서 괜히 1차선이나 2차선 대신
3차선에서 얌전하게 달리기로 마음을 잡았다.
오늘의 목표는 단 하나.
“휴게소에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서울 도착하기.”
그렇게 1시간을 달렸을까.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도로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오늘은 어둠에서 밝아졌다가, 해 질 무렵 다시 밝음에서 어둠으로 돌아오겠네.”
하루 안에 빛이 두 번 바뀌는 여정을 가는 셈이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나도 오늘, 한 번 밝아지고 한 번 어두워지며
하나의 변화를 겪을 것 같은 예감.
그렇게 달려 동서울 톨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차량은 더 많아졌고, 올림픽대로에 진입하는 순간부터는
이해할 수 없는 막힘이 시작됐다.
“아니… 9시인데 왜 이렇게 막히지?”
지방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풍경.
대구에서 서울까지 3시간이 걸렸는데,
올림픽대로에서 주차장까지 1시간이 걸리는 이 아이러니.
주차장에 도착해 움직이니깐
단 한 번도 쉬지 않았던 몸이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다.
주차장에서 서울 카페쇼까지
버스를 타면 20~30분 걸릴 거리지만
걸어가면 10분이라 해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걷는 동안에도 계속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서울은… 진짜 복잡하구나....”
드디어 카페쇼에 입성했다.
주변 김밥집에서 밥을 먹으려고 했지만
낯선 거리에서 식당을 찾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안 그래도 없는 시간 일단 구경부터 하기로 했다.
복잡한 곳은 너무 복잡했고,
여유로운 곳은 또 너무 여유로웠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관심 있는 로스터기들 앞에 서서
설명도 듣고, 가격도 보고, 크기·연료·스펙까지 꼼꼼히 들었다.
그러다 결국 허기가 몰려왔다.
지하에 음식점이 있다길래 내려갔더니
새우튀김 하나 주고 휴게소 가락국수 같은 메뉴가 12,000원.
돈가스는 18,000원.
서울… 특히 강남…
비쌀 것이라는 건 머리로 이해해도,
퀄리티 대비 가격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도 배가 너무 고파서 그냥 먹었다.
그리고 다시 로스터기들 앞에서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실제 설명을 비교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라… 내가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한데?”
괜히 마음이 끌려
결국 계약금 200만 원을 걸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후 3시였다.
진짜 보고 싶은 곳도 많고,
아직 둘러보지 못한 코너도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다시 10분을 걸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대구로 내려가는 길은 다행히 막히지 않았다.
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어도
7시 30분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갔다.
내가 계약한 로스터기가 좋은 선택인지,
전 버전을 중고로 사는 게 나은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될지.
충주 휴게소에 도착해 밥을 먹는데
문득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지금 저녁 6시가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밥을 처음 먹는구나.”
눈물의 식사 같았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의 모든 감정이
하나로 쏟아져 내려오는 느낌.
대구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 조금 안 됐고,
씻고 누워 있으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정신없이 지나가버린 하루였다.
그리고 스스로 놀라운 건 이거였다.
살면서 스스로에게 큰돈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억지로 무리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40만 원짜리 그라인더 하나도
몇 달째 고민만 하고 있는데…
로스터기 계약금 200만 원?
그리고 전체 금액은 그 몇 배?
나 스스로가 놀라고 있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좋아한 적이 있었나?”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처럼 하나에 미친 듯이 빠져들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따라가고 싶어진 감정.
생각해 보면, 드립은 자신 있지만,
커핑도 그렇고,
바리스타 기술도, 로스팅도
아직은 미숙한 단계다.
경험 많은 사람들에 비해
내 손끝은 서툴고
내 감각은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미숙함이
부끄럽거나 아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느꼈다.
“ 나는 지금 이 길을 좋아하게 된 사람이구나.”
나는 ‘커피 맛’을 쫓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향을 중심으로 커피를 배우는 사람이다.
맛은 평가지만,
향은 기억이니까.
향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움직인다.
어떤 날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떤 날엔 흐릿한 하루를 환하게 살리고,
어떤 날엔 오래 묵혀둔 감정까지 꺼내 올린다.
로스팅을 하며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건
불의 흐름도, 그래프도, 스킬도 아니었다.
향이 태어나는 순간을 내 손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하루에 조용히 선물처럼 놓아두는
작고 따뜻한 편지 같았다.
나는 그 편지를 만들고 싶다.
누군가는 아메리카노를 습관처럼 마시지만
나는 그 한 잔이 누군가에게 좋은 날의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그 사람의 기분을 조금 더 가볍게 하고,
조용히 숨을 고르게 해주는 향.
문득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향.
잊고 있던 마음을 깨우는 향.
그런 향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로스터기를 보고,
나답지 않게 큰 결정을 내린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앞으로 만들어갈 향의 세계에 대한 투자였으니까.
아직은 미숙하고,
아직 내 손은 완벽하지 않고,
아직 내 코는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다.
나는 향으로 사람의 하루를 바꾸는 로스터가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만든 한 잔을 마신 누군가가
조용히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 이 커피 덕분에 기분이 좋다. ”
그 한 문장을 위해,
나는 기꺼이 더 배우고, 더 실패하고, 더 달릴 것이다.
오늘 느낀 이 마음이
아마 나를 오래 데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