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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석 Nov 20. 2021

고양하는 고양이

베르나르 베르베르,《고양이》

사람과 고양이는 다소 특별한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반려동물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이 반려동물의 주인으로 이들을 '키운다'는 표현을 주로 쓴다. 하지만 고양이의 경우 완전히 반대의 관계이다. '주객전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람은 고양이의 '집사'로 고양이의 시중을 들어준다고 표현한다. 고양이가 침대에 누워있으면 비켜야 하는 건 우리이고, 배고프다고 하면 얼른 사료를 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업무이다. 만약 이런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고양이가 인류를 지배하는 그림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런 상상을 글로 옮겨보는 것에 도전했고, 그 결과가 《고양이》이다. 말하는 것에서 한 단계 나아가 사고 과정까지 사람을 닮아있다. 심지어 한국에서의 사람-고양이의 관계를 알고 있는지, '고양이가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도도하면서 오만하기까지 한 자세를 작품 속 고양이에게 투영시킨다. 이러한 고양이의 시점으로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 이 작품의 경우 폭력과 테러라는 극단적인 행태의 사건 - 을 바라보고, 그 연장선 상에서의 철학적인 사유까지 담아내고 있다.



고양이를 화자로?

양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점이 신선하면서도 재미있었다. 사람의 시점으로 풀어냈다면 너무 당연하고 고리타분하게 들렸을 이야기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의 시점으로 바라보아 색다르게 느껴졌다. 초반에 고양이가 여러 물건이나 사람의 행동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고양이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일지 예측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갓난아기가 바라보는 세상을 말로 풀어낸다면 이렇지 않을까?


화자를 고양이로 설정한 이유를 철학적으로도 생각해보았다. 주인공인 '바스테트'는 처음에 순수함 혹은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지식을 듣고 주변을 느끼면서 여러 생각과 지식을 하나둘씩 깨우쳐 나가기 시작한다. 마지막에는 삶에 대한 사유를 통한 깨우침을 거쳐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공상적인 측면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고양이는 도달한 셈이다. 이에 대해 반성적이면서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베르나르의 작품에는 고양이가 여럿 등장한다. 각 작품에서 이들은 대부분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기에 이번 작품을 통해 고양이가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펼처놓은게 아닐까 싶다. 혹은 정말 단순하게 고양이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고...



'피타고라스'와 '바스테트'의 대조

어떤 책에서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병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떤 생각해 볼거리가 있을지 고민해보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고양이,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를 대조하면서 하나의 메시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야기의 초반에서 '피타고라스'는 인간의 세상을 이해한 고양이, '바스테트'는 호기심은 많지만 인간과 소통이 되지 않아 자신의 틀 안에만 갇혀있는 고양이로 묘사된다. 그래서 '바스테트'는 '피타고라스'에게 지식을 배우는 관계로, 선생과 제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피타고라스'가 더 우월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피타고라스'가 인터넷 세상에 연동되어있는 동안, '바스테트'는 접하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내면세계에서 생각의 가지를 펼쳐나간다. 이때부터 둘의 양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피타고라스'는 정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내린다. 하지만 지식이 늘어가는 것과는 달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멈추게 된다.


반대로 '바스테트'는 지식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한 단계 높은 철학적인 사유까지 하기에 이른다. 나중에는 확신에 찬 모습에 더불어 스스로에게 당당하다는 듯한 자세를 보인다. 점차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는 '피타고라스'의 모습과는 대비된다.



책에서 찾아본 메시지

이 두 고양이의 대비되는 모습은 마치 현대인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무기이자 방패는 지금도 접속해있는 인터넷 세상이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깔려있다. 덕분에 사람들은 방대한 지식을 영원히 보관할 수 있게 되며, 이를 전 세계와 공유하며 서로의 발전을 함께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정보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너무 많은 정보에 압도되기도 하며 이 정보들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는 압박에 오히려 불안해하기도 한다. 정보의 늪에 갇혀 행동과 사고가 자유롭게 뻗지 못하고 보이는 정보에만 제한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남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되려 다른 사람에게 열등감을 심어준다거나, 거짓되거나 편협된 소식은 잘못된 사고 과정을 발현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면을 모두 완전하게 보인 것은 아니지만, '피타고라스'와 '바스테트'의 대조되는 모습은 포괄적인 메시지를 던지기에는 충분하다. 정보의 홍수가 일어나는 인터넷 세상에 휩쓸리지 말고, 한 걸음 물러나 내면을 순수함으로 채워보라는 메시지를.

어떠한 것도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너무 인터넷 세상에 몰두되어 있는 현재에는 '바스테트'와 같은 시각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마무리하며

가볍게 읽으라면 베르나르의 엉뚱함과 신선함을 즐기며 가볍게 읽을 수 있고, 무겁게 읽으라면 충분히 여러 질문과 생각을 던지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충분히 가변적이다. 그리고 베르나르의 책인 '신'과 '제3인류'를 읽으며 너무 길고 세계관도 넓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부담 없이 읽기에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작품 중 인상 깊었던 말을 남기며 마무리하려 한다. 이런 소재의 책에서 나올만한 깊이의 내용이 아닌데 - 하는 생각에 놀라면서 읽었던 기억이 깊게 남아있다.



내일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몸의 안위만 추구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
 내 영혼은 경험을 쌓기 위해 현생을 택한 것이다. 시련은 나를 가르치고 나를 고양시킨다.
내 삶이 최고가 되기 위해 꼭 편하고 완벽한 필요는 없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나는 누구와도 경쟁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나는 누가 흉내 낼 수 없는 나 자신만의 유일무이한 나의 궤도를 따라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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