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늙어봤냐?

가을 끝자락이라도 단풍은 아름답다

by WooSun


나는 마흔다섯 나이에 12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양육미혼모이다. 많지 않은 마흔다섯의 인생을 돌아보면 나에게는 항상 쉬운 일들보다는 힘든 일, 어려운 일이 많았다. 그래도 타고난 천성이 밝고 긍정적이라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려 하고, 잘 될 거라는 기대를 먼저 가지는 편이다. 그런 내가 생각지도 못한 미혼모가 되었고, 미혼모로 12년을 살았다. 미혼모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계층을 돕는 제도 덕분에 바리스타 일을 배울 기회를 얻었고, 대기업 사내카페의 바리스타로 일하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밝게 커 주던 아들이 3학년 2학기부터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겪게 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월급을 받던 워킹맘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저소득층으로 1년 이상을 보내면서 다행히 아이의 상태가 좋아졌다.

그즈음 거의 평생을 살던 서울을 등지고 먹고 사는 문제로 경기도 동두천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이사한 이유는 간단했다. 좋아하는 바리스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몸도 고되고 바쁘디바쁜 워킹맘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일을 하면서 너무 신났다. 이 사회에서 나도 쓸모있는 사람 같아서 일이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아이가 또다시 학교거부와 우울증, 자살 충동으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또다시 눈물을 삼키며 쓰린 마음으로 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가정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하며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도 커졌고, 내가 좋아하는 바리스타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집중한다는 것이, 더욱이 사춘기를 맞이하는 5학년 남자아이를 돌보며 지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분명 같은 아들인데, 미취학 시절의 아이와 저학년 시절의 아이, 5학년 사춘기가 된 아이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자꾸 자기만의 동굴을 찾아 들어가려 했고, 성별이 다른 엄마와 무엇을 같이하고 함께 하려는 일도 점점 드물어졌다. 아이와의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상황이 자주 반복되었고 나는 내가 일까지 포기한 보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허망함이 들며 점점 무기력과 우울증에 잠식당하게 되었다.

좋아지려고 결심한 퇴직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가정 경제상황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점점 몰아갔다. 아이가 느낄 만큼 경제 상황이 나빠지게 되니 아이도 엄마가 일하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엄마는 언제 일하러 가냐고 자주 물어보곤 했다. 그래서 하루 4시간 정도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내 상황을 잘 아는 돌봄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어머님, 혹시 일을 구하고 계시나요?”

“네, 선생님. 그런데 4시간 정도만 할 수 있는 고정적인 일이 생각보다 없네요.”

“그럼 어머니, 자활을 한번 해보시면 어떠세요?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하면 월급도 2인 기준 생계급여가 나온다고 해요. 아이가 아프니까 아이를 돌보면서 일을 하기에 딱 좋은 것 같아요. 오늘 당장 고용센터에 가셔서 자활담당 선생님을 만나 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락 드리고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우리 가족에게 한 줄기 빛이 생긴 것 같았다. 아직 고용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너무 행복했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싶어,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늘 오가던 동네인데도 기쁜 마음 덕분인지 고용센터를 찾아가는 길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고, 그제야 어느덧 저물어 가는 가을이 느껴졌다. 가을은 마지막 순간까지 뽐내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는 듯 떨어진 낙엽 하나에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색깔을 잃지 않으며 자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입에서 저절로 ‘우와’ 하는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의 새빨간 단풍들, 눈이 아플 듯 말 듯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길가에 떨어져서, 또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내 마음을 위로하듯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고용센터에 도착해서 자활담당 선생님을 만났고 바로 면담이 시작되었다.

“어머님, 그럼 4시간 정도 근무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은데, 혹시 식당으로 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청소를 원하세요?”

’일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왔음에도 순간 ‘어느 쪽이 조금 덜 힘들고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하는 생각에 잠깐 고민하는 사이, 고민이 무색할 만큼 선생님께서 곧바로 답을 내 버리셨다.

“에구, 어머님. 지금 식당 쪽은 일할 곳이 없네요. 주간 재활센터라고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곳에서 청소하시는 일이 있는데, 혹시 어떠세요?”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도 간사한 것인지…….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곳’, ‘청소’라는 단어를 들으며 나는 마흔다섯이면 젊다면 젊은 나이인데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고를 수는 없을까 하는 궁리가 들었다. 하지만 고용센터로 걸어오던 가을 끝자락의 낙엽에도 감사하다는 고백이 나왔던 순간이 떠오르며, 지금 아이와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하려면 이 일이라도 감사하자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그 일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주간 재활센터에 연락해서 곧바로 찾아뵙겠다고 했다. 주간 재활센터에 도착하니 사회복지 선생님이 웃으며 맞이해 주셨다. 안내된 사무실 의자에 앉기 무섭게 곧바로 들리는 이야기.

“자활 선생님, 내일 바로 출근하시죠?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하면 어떨까요?”

“하하, 네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내일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모든 일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웃음만 나왔다. 일하기로 약속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한 어르신께서 “내일부터 나오는 선생님이야? 하하! 젊어 좋구나. 내일 봅세.” 하시며 손을 잡아 주셨다. 생각지 못한 환대에 순간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어르신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손에서 느껴진 온기 때문이었는지, 눈물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센터 출근 첫날 아침.

바리스타 일은 오후에 출근하는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일은 무언가 낯설면서도 새로운 감정이 들게 했다. 첫 출근날 문을 들어서는데 미리 센터에 와 계신 많은 어르신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셨다. 마주한 수십 개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나하나 적당히 피하며, 혹은 맞추며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서 있는 중에 반가운 구원투수 같은 요양사 선생님들이 (휴~ 살았다!) 오셨다.

선생님 중 한 분의 안내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출근하면 나는 제일 먼저 어르신들이 도착하신 후 드실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물리치료실을 청소했다. 그렇게 제일 먼저 시작한 물리치료실 청소. 물리치료실 바닥은 까만색 천으로 덮여 있는데 그러다 보니 바닥에 떨어진 어르신들의 흰 머리카락이 잘 보였다. 여기 오기 전까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당연히 검은 머리카락인 줄만 알았는데 여기서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온통 흰색이라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발견처럼 여겨졌다. 바닥의 머리카락을 줍고 청소한 뒤에는 이불을 털고 제자리에 잘 펼쳐 놓았다. 이불은 무겁고 두꺼워 털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리해 놓은 넓은 물리치료실을 보니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어르신이 물리치료실에 들어와 내가 정리한 이불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다소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아, 내 이불이 이거야. 다음에는 저 안쪽 내 자리에 내 이불을 꼭 놔줘. 부탁혀.”

깨끗이 칼각으로 정리된 물리치료실을 보며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가 타박이라니…….

“네, 어르신!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대답하는 나에게 곁에서 지켜보던 요양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원래 박점례 어르신은 그래요. 자기 것에 철저하신 분이셔. 근데 저거 어르신 개인이불 아니고 센터 이불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며칠 지내보니 일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본 생경한 일들이 많았다. 또 어르신들의 다양한 성향이 보였다. 어르신 중 어떤 분은 자기 것에 철저하고, 어떤 분은 뭐든 선생님들께 다 가져다주고, 어떤 분은 자꾸 나보고 일을 너무 많이 한다며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디를 가든, 일을 더 많이 하라고 했지, 쉬어가며 눈치 보며 하지 말라고 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또 내가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청소를 하면 몇 분 어르신들은 조용히 옆에서 “고마워, 선생님.”눈을 맞추며 따뜻한 격려의 말씀도 해주신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인데 뭐가 고맙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어르신들의 고마운 말씀이 위로가 됐고 행복한 기분을 들게 했다.

주간 재활센터에서 인상적인 일과 중 하나는 남자 팀장님이 진행하시는 체조 시간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아는 체조는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맞춰 똑같은 동작을 하면서 몸의 근육을 풀어 시원한 느낌이나 건강해지는 느낌이 나도록 하는 것인데, 여기의 체조 시간은 달랐다. 우선 음악부터가 다르다. 음악은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할 비트! 트로트여야 한다. 트로트 반주와 노래에 맞춰 박수, 손목 돌리기, 양손 만세 등 간단한 일상 동작을 한다. 이런 단순한 동작이 무슨 재미와 효과가 있을까 싶은데, 신기하게도 어르신들은 체조 시간 동안 얼굴이 밝아지고 기운이 차오른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활동은 출석 체크이다. 어르신들은 본인의 이름이 호명되면 앉았다가 일어나서 대답하는데, 어르신 중에는 그것조차도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있고, 호명되지 전까지 긴장하며 기다리시는 분들도 있다. 처음 출석 체크 하는 모습을 보고는 ‘왜 이렇게 긴장을 하실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출석 체크 과정을 지켜보니 그분들에게 출석 체크란 ‘나도 일어날 수 있다.’, ‘나도 소리칠 수 있다.’, ‘나 아직 건강하고 잘살고 있다.’라는 것을 선생님들에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곳 식사시간에 그 말의 의미를 자주 생각하게 된다. 센터에서의 식사시간은 음식점에서 해 온 밥과 반찬을 어르신들 식판에 덜어 배식해 드리면 되는 일이다. 어르신들 각자의 자리에 준비된 식판 식사와 물을 놓아 드리면 어르신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시는데 거동이 힘든 분들이 계셔서 도움을 드리게 된다. 유치원 아이들처럼 너무 좋아하시는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처럼 편식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또한, 작은 것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잘하는 아이처럼, 내가 요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각 자리에 준비한 것을 놓아드렸을 뿐인데 뭐가 그리 고마우신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신다.

즐겁고 정신없는 식사시간이 끝나면 빠르게 설거지와 식당 정리를 마친 후 커피 타임을 갖는다. 체조 시간만큼이나 어르신들이 참 좋아하시는 시간이다. 대한민국 믹스커피의 맛은 오랜 세대를 거쳐 이미 증명된 맛이 아닌가? 즐거운 커피타임까지 끝나고 나면 나의 일과도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된다. 며칠 전 퇴근하려고 옷을 입고 있는데 며칠 동안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주시던 어르신 한 분이 다가오시며 나를 처음 본 것처럼 말씀하셨다.

“아가씨, 어디가? 이쁘네. 다음에 또 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 오랜만에 ‘아가씨’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르신이랑 오며 가며 자주 얘기하고 다른 분보다 옆에 오래 있었는데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대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이 치매가 좀 있으세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내일 봐요.”

곁에 있던 요양 선생님이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 그랬구나. 정말 따뜻한 말씀을 많이 하셨던 어르신인데 마음이 짠했다.

그곳에서 일하며 어르신들의 다양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박병오(가명) 어르신은 전직 A방송국 사장님이셨다고 한다. 신문사에 계시다가 스물 두 살에 A방송국으로 들어가셨단다. A방송국에서는 감독도 하셨다고 하는데 무슨 감독인지는 말해주지 않으신다. 내게도 한번 보고 싶은 배우가 있냐고 물어보셨다.

“하하! 한 사람만 고를 수 없는데요, 어르신.”

“보고 싶은 배우 있으면 말해. 지금 신입은 모르지만 내가 전원일기에 나온 배우 정도는 알아. 배우들 여기로 부르고 싶은데 할머니들이 너무 엉뚱한 말을 해서 못 데려왔어.”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 더 커진 목소리의 자랑 한 말씀. “우리 아들, 며느리 A지점 A은행 지점장이야.”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박은영(가명) 어르신은 젊은 친구들처럼 옷을 입으시는데 핑크색 트레이닝복에 비니를 쓰시는 멋쟁이시다. 요양사 선생님들 말씀에 따님이 무척 세련되신 분이라고 한다. 근데 요즘 그 멋쟁이 어르신이 부쩍 힘도 없어지시고 자꾸만 누워 계시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위랑 장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했다.

이소라(가명) 어르신은 차에서 내리실 때부터 센터에 계시는 동안 계속 휠체어에 앉아 계신다. 가끔 물리치료실에 가서 쉬고 싶으시면 선생님들 두 분 이상은 꼭 계셔야 어르신이 누울 수 있다. 편하도록 많은 장치가 있는 휠체어를 타지만 소파도 아닌 그저 휠체어라 너무 힘드실 것 같아 늘 마음이 짠하다.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미리 다양한 노년을 경험하는 것 같아 여러 생각과 만감이 교차하는 나의 4시간짜리 일터. 분명히 이곳 어르신들에게 있었을 젊은 시절은 지금의 나만큼, 아니 혹은 그 이상 너무도 치열하였을 것이다. 분명 저분들도 마냥 즐거운 10대를 보내셨을 것이고, 20, 30대의 열정을 가지고 일도, 사랑도 하셨을 것이다. 40~70대까지는 자녀들을 위해서 사셨을 것이고 그 삶에서 죽을 것 같은 고난도 있었을 것이고,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의 눈으로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 아플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패배자 같은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의 인생은 어떠한가? 과연 그렇게 슬프고 안쓰럽기만 한 것일까? 우리 센터 체조 시간에 힘주어 외치는 그분들의 큰 목소리는 이것이다.

“너 늙어봤냐? 나 젊어 봤다!!”

아직 늙어 보지 않았기에 모르는 인생의 참맛(쓴맛이든 단맛이든)들을 그분들은 안다. 그렇다. 어르신들은 젊어도 봤고, 늙어도 봤으며, 여전히 늙어가는 중인 ‘인생 선배’다. 주름이 많아서, 거동이 불편해서, 흰머리가 많아서 어르신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먼저 치열하게 살아오셨기에 그 주름이, 흰머리가 훈장이 된 어르신이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어도, 나뭇가지에 아직 붙어 있는 나뭇잎이어도 가을이라는 계절 한가운데, 아니 계절의 끝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의 가을 단풍처럼 말이다.

센터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어느샌가 기쁘게 재촉하는 발걸음이 되었다. 나도 빨리 집으로 가서 나 자신과 아들에게 삶의 힘이 되는 추억을 쌓아보자는 다짐과 마음이 매일 새록새록 생긴다. 한창을 넘어 이제 끝자락만 남았음을 보여주는 길 위의 낙엽들을 사부작사부작 밟으며, 마흔다섯 미혼모의 삶을 서러움보다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훈장처럼 늙어가는 기쁨이라고 되뇌어 본다.

나는 마흔다섯 나이에 12살 아들을 키우고 있는 양육미혼모이다. 많지 않은 마흔다섯의 인생을 돌아보면 나에게는 항상 쉬운 일들보다는 힘든 일, 어려운 일이 많았다. 그래도 타고난 천성이 밝고 긍정적이라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려 하고, 잘 될 거라는 기대를 먼저 가지는 편이다. 그런 내가 생각지도 못한 미혼모가 되었고, 미혼모로 12년을 살았다. 미혼모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계층을 돕는 제도 덕분에 바리스타 일을 배울 기회를 얻었고, 대기업 사내카페의 바리스타로 일하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중 밝게 커 주던 아들이 3학년 2학기부터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겪게 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월급을 받던 워킹맘에서 정부 보조금을 받는 저소득층으로 1년 이상을 보내면서 다행히 아이의 상태가 좋아졌다.

그즈음 거의 평생을 살던 서울을 등지고 먹고 사는 문제로 경기도 동두천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이사한 이유는 간단했다. 좋아하는 바리스타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몸도 고되고 바쁘디바쁜 워킹맘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일을 하면서 너무 신났다. 이 사회에서 나도 쓸모있는 사람 같아서 일이 너무 재밌고 즐거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아이가 또다시 학교거부와 우울증, 자살 충동으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다. 또다시 눈물을 삼키며 쓰린 마음으로 일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가정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약물치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하며 아이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도 커졌고, 내가 좋아하는 바리스타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집중한다는 것이, 더욱이 사춘기를 맞이하는 5학년 남자아이를 돌보며 지내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분명 같은 아들인데, 미취학 시절의 아이와 저학년 시절의 아이, 5학년 사춘기가 된 아이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자꾸 자기만의 동굴을 찾아 들어가려 했고, 성별이 다른 엄마와 무엇을 같이하고 함께 하려는 일도 점점 드물어졌다. 아이와의 관계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상황이 자주 반복되었고 나는 내가 일까지 포기한 보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허망함이 들며 점점 무기력과 우울증에 잠식당하게 되었다.

좋아지려고 결심한 퇴직이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가정 경제상황도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점점 몰아갔다. 아이가 느낄 만큼 경제 상황이 나빠지게 되니 아이도 엄마가 일하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엄마는 언제 일하러 가냐고 자주 물어보곤 했다. 그래서 하루 4시간 정도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내 상황을 잘 아는 돌봄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어머님, 혹시 일을 구하고 계시나요?”

“네, 선생님. 그런데 4시간 정도만 할 수 있는 고정적인 일이 생각보다 없네요.”

“그럼 어머니, 자활을 한번 해보시면 어떠세요? 하루 4시간 정도만 일하면 월급도 2인 기준 생계급여가 나온다고 해요. 아이가 아프니까 아이를 돌보면서 일을 하기에 딱 좋은 것 같아요. 오늘 당장 고용센터에 가셔서 자활담당 선생님을 만나 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락 드리고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우리 가족에게 한 줄기 빛이 생긴 것 같았다. 아직 고용이 확정된 것도 아닌데 너무 행복했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싶어,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늘 오가던 동네인데도 기쁜 마음 덕분인지 고용센터를 찾아가는 길을 돌아볼 여유도 생겼고, 그제야 어느덧 저물어 가는 가을이 느껴졌다. 가을은 마지막 순간까지 뽐내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는 듯 떨어진 낙엽 하나에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색깔을 잃지 않으며 자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입에서 저절로 ‘우와’ 하는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의 새빨간 단풍들, 눈이 아플 듯 말 듯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길가에 떨어져서, 또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내 마음을 위로하듯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고용센터에 도착해서 자활담당 선생님을 만났고 바로 면담이 시작되었다.

“어머님, 그럼 4시간 정도 근무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은데, 혹시 식당으로 가고 싶으세요? 아니면 청소를 원하세요?”

’일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왔음에도 순간 ‘어느 쪽이 조금 덜 힘들고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하는 생각에 잠깐 고민하는 사이, 고민이 무색할 만큼 선생님께서 곧바로 답을 내 버리셨다.

“에구, 어머님. 지금 식당 쪽은 일할 곳이 없네요. 주간 재활센터라고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곳에서 청소하시는 일이 있는데, 혹시 어떠세요?”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도 간사한 것인지……. ‘할머니, 할아버지 계신 곳’, ‘청소’라는 단어를 들으며 나는 마흔다섯이면 젊다면 젊은 나이인데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고를 수는 없을까 하는 궁리가 들었다. 하지만 고용센터로 걸어오던 가을 끝자락의 낙엽에도 감사하다는 고백이 나왔던 순간이 떠오르며, 지금 아이와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하려면 이 일이라도 감사하자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그 일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주간 재활센터에 연락해서 곧바로 찾아뵙겠다고 했다. 주간 재활센터에 도착하니 사회복지 선생님이 웃으며 맞이해 주셨다. 안내된 사무실 의자에 앉기 무섭게 곧바로 들리는 이야기.

“자활 선생님, 내일 바로 출근하시죠?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하면 어떨까요?”

“하하, 네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내일 바로 출근하겠습니다.”

모든 일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웃음만 나왔다. 일하기로 약속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는데, 한 어르신께서 “내일부터 나오는 선생님이야? 하하! 젊어 좋구나. 내일 봅세.” 하시며 손을 잡아 주셨다. 생각지 못한 환대에 순간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눈물이 핑 돌았다. 어르신의 거칠고 굵은 손마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손에서 느껴진 온기 때문이었는지, 눈물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센터 출근 첫날 아침.

바리스타 일은 오후에 출근하는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오전 9시까지 출근하는 일은 무언가 낯설면서도 새로운 감정이 들게 했다. 첫 출근날 문을 들어서는데 미리 센터에 와 계신 많은 어르신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셨다. 마주한 수십 개의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나하나 적당히 피하며, 혹은 맞추며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서 있는 중에 반가운 구원투수 같은 요양사 선생님들이 (휴~ 살았다!) 오셨다.

선생님 중 한 분의 안내로 바로 일을 시작했다. 출근하면 나는 제일 먼저 어르신들이 도착하신 후 드실 따뜻한 물을 준비하고 물리치료실을 청소했다. 그렇게 제일 먼저 시작한 물리치료실 청소. 물리치료실 바닥은 까만색 천으로 덮여 있는데 그러다 보니 바닥에 떨어진 어르신들의 흰 머리카락이 잘 보였다. 여기 오기 전까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당연히 검은 머리카락인 줄만 알았는데 여기서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온통 흰색이라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운 발견처럼 여겨졌다. 바닥의 머리카락을 줍고 청소한 뒤에는 이불을 털고 제자리에 잘 펼쳐 놓았다. 이불은 무겁고 두꺼워 털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정리해 놓은 넓은 물리치료실을 보니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어르신이 물리치료실에 들어와 내가 정리한 이불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다소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아, 내 이불이 이거야. 다음에는 저 안쪽 내 자리에 내 이불을 꼭 놔줘. 부탁혀.”

깨끗이 칼각으로 정리된 물리치료실을 보며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가 타박이라니…….

“네, 어르신! 알겠습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대답하는 나에게 곁에서 지켜보던 요양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원래 박점례 어르신은 그래요. 자기 것에 철저하신 분이셔. 근데 저거 어르신 개인이불 아니고 센터 이불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며칠 지내보니 일하기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본 생경한 일들이 많았다. 또 어르신들의 다양한 성향이 보였다. 어르신 중 어떤 분은 자기 것에 철저하고, 어떤 분은 뭐든 선생님들께 다 가져다주고, 어떤 분은 자꾸 나보고 일을 너무 많이 한다며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디를 가든, 일을 더 많이 하라고 했지, 쉬어가며 눈치 보며 하지 말라고 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또 내가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청소를 하면 몇 분 어르신들은 조용히 옆에서 “고마워, 선생님.”눈을 맞추며 따뜻한 격려의 말씀도 해주신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인데 뭐가 고맙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어르신들의 고마운 말씀이 위로가 됐고 행복한 기분을 들게 했다.

주간 재활센터에서 인상적인 일과 중 하나는 남자 팀장님이 진행하시는 체조 시간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아는 체조는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행동을 맞춰 똑같은 동작을 하면서 몸의 근육을 풀어 시원한 느낌이나 건강해지는 느낌이 나도록 하는 것인데, 여기의 체조 시간은 달랐다. 우선 음악부터가 다르다. 음악은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할 비트! 트로트여야 한다. 트로트 반주와 노래에 맞춰 박수, 손목 돌리기, 양손 만세 등 간단한 일상 동작을 한다. 이런 단순한 동작이 무슨 재미와 효과가 있을까 싶은데, 신기하게도 어르신들은 체조 시간 동안 얼굴이 밝아지고 기운이 차오른다.

이어지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활동은 출석 체크이다. 어르신들은 본인의 이름이 호명되면 앉았다가 일어나서 대답하는데, 어르신 중에는 그것조차도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있고, 호명되지 전까지 긴장하며 기다리시는 분들도 있다. 처음 출석 체크 하는 모습을 보고는 ‘왜 이렇게 긴장을 하실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며칠 동안 출석 체크 과정을 지켜보니 그분들에게 출석 체크란 ‘나도 일어날 수 있다.’, ‘나도 소리칠 수 있다.’, ‘나 아직 건강하고 잘살고 있다.’라는 것을 선생님들에게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곳 식사시간에 그 말의 의미를 자주 생각하게 된다. 센터에서의 식사시간은 음식점에서 해 온 밥과 반찬을 어르신들 식판에 덜어 배식해 드리면 되는 일이다. 어르신들 각자의 자리에 준비된 식판 식사와 물을 놓아 드리면 어르신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시는데 거동이 힘든 분들이 계셔서 도움을 드리게 된다. 유치원 아이들처럼 너무 좋아하시는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처럼 편식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또한, 작은 것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잘하는 아이처럼, 내가 요리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각 자리에 준비한 것을 놓아드렸을 뿐인데 뭐가 그리 고마우신지 연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신다.

즐겁고 정신없는 식사시간이 끝나면 빠르게 설거지와 식당 정리를 마친 후 커피 타임을 갖는다. 체조 시간만큼이나 어르신들이 참 좋아하시는 시간이다. 대한민국 믹스커피의 맛은 오랜 세대를 거쳐 이미 증명된 맛이 아닌가? 즐거운 커피타임까지 끝나고 나면 나의 일과도 끝나고 퇴근 시간이 된다. 며칠 전 퇴근하려고 옷을 입고 있는데 며칠 동안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주시던 어르신 한 분이 다가오시며 나를 처음 본 것처럼 말씀하셨다.

“아가씨, 어디가? 이쁘네. 다음에 또 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 오랜만에 ‘아가씨’라는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르신이랑 오며 가며 자주 얘기하고 다른 분보다 옆에 오래 있었는데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나를 대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르신이 치매가 좀 있으세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내일 봐요.”

곁에 있던 요양 선생님이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아 그랬구나. 정말 따뜻한 말씀을 많이 하셨던 어르신인데 마음이 짠했다.

그곳에서 일하며 어르신들의 다양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박병오(가명) 어르신은 전직 A방송국 사장님이셨다고 한다. 신문사에 계시다가 스물 두 살에 A방송국으로 들어가셨단다. A방송국에서는 감독도 하셨다고 하는데 무슨 감독인지는 말해주지 않으신다. 내게도 한번 보고 싶은 배우가 있냐고 물어보셨다.

“하하! 한 사람만 고를 수 없는데요, 어르신.”

“보고 싶은 배우 있으면 말해. 지금 신입은 모르지만 내가 전원일기에 나온 배우 정도는 알아. 배우들 여기로 부르고 싶은데 할머니들이 너무 엉뚱한 말을 해서 못 데려왔어.”

그리고 이어지는 조금 더 커진 목소리의 자랑 한 말씀. “우리 아들, 며느리 A지점 A은행 지점장이야.” 이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박은영(가명) 어르신은 젊은 친구들처럼 옷을 입으시는데 핑크색 트레이닝복에 비니를 쓰시는 멋쟁이시다. 요양사 선생님들 말씀에 따님이 무척 세련되신 분이라고 한다. 근데 요즘 그 멋쟁이 어르신이 부쩍 힘도 없어지시고 자꾸만 누워 계시려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위랑 장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가셔야 한다고 했다.

이소라(가명) 어르신은 차에서 내리실 때부터 센터에 계시는 동안 계속 휠체어에 앉아 계신다. 가끔 물리치료실에 가서 쉬고 싶으시면 선생님들 두 분 이상은 꼭 계셔야 어르신이 누울 수 있다. 편하도록 많은 장치가 있는 휠체어를 타지만 소파도 아닌 그저 휠체어라 너무 힘드실 것 같아 늘 마음이 짠하다.

마흔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미리 다양한 노년을 경험하는 것 같아 여러 생각과 만감이 교차하는 나의 4시간짜리 일터. 분명히 이곳 어르신들에게 있었을 젊은 시절은 지금의 나만큼, 아니 혹은 그 이상 너무도 치열하였을 것이다. 분명 저분들도 마냥 즐거운 10대를 보내셨을 것이고, 20, 30대의 열정을 가지고 일도, 사랑도 하셨을 것이다. 40~70대까지는 자녀들을 위해서 사셨을 것이고 그 삶에서 죽을 것 같은 고난도 있었을 것이고,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의 눈으로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 아플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떻게 보면 패배자 같은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분들의 인생은 어떠한가? 과연 그렇게 슬프고 안쓰럽기만 한 것일까? 우리 센터 체조 시간에 힘주어 외치는 그분들의 큰 목소리는 이것이다.

“너 늙어봤냐? 나 젊어 봤다!!”

아직 늙어 보지 않았기에 모르는 인생의 참맛(쓴맛이든 단맛이든)들을 그분들은 안다. 그렇다. 어르신들은 젊어도 봤고, 늙어도 봤으며, 여전히 늙어가는 중인 ‘인생 선배’다. 주름이 많아서, 거동이 불편해서, 흰머리가 많아서 어르신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긴 시간을 먼저 치열하게 살아오셨기에 그 주름이, 흰머리가 훈장이 된 어르신이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이어도, 나뭇가지에 아직 붙어 있는 나뭇잎이어도 가을이라는 계절 한가운데, 아니 계절의 끝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의 가을 단풍처럼 말이다.

센터에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어느샌가 기쁘게 재촉하는 발걸음이 되었다. 나도 빨리 집으로 가서 나 자신과 아들에게 삶의 힘이 되는 추억을 쌓아보자는 다짐과 마음이 매일 새록새록 생긴다. 한창을 넘어 이제 끝자락만 남았음을 보여주는 길 위의 낙엽들을 사부작사부작 밟으며, 마흔다섯 미혼모의 삶을 서러움보다는 용기와 희망, 그리고 훈장처럼 늙어가는 기쁨이라고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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