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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처음

새벽에 첫물 생강차를 마시며

by 우선열

이제 막 물 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스 불을 켠 지 십여 분, 조금 있으면 주전자 꼭지에서 하얗게 김이 생겨 주변으로 흩어지며 은은한 생강 향이 번질 것이다. 새로이 생강차를 만들었으니 주전자가 묵직했다

이번 잔은 맑고 비교적 투명한 노란색 생강차가 될 것이다. 아침마다 가스 불 위에서 단련을 받는 생강차는 나날이 색이 진해지며 탁해진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맑을 때는 톡 쏘는 생강 향이 조금 더 진한 것도 같다.

오래 우려 졸아든 생강차가 진해졌으련만 생강 본연의 톡 쏘는 향은 갓 끓인 첫 물이 좋다.

겉절이와 묵은지 같다고나 할까? 묵은지의 어우러지는 맛과 겉절이의 풋풋한 맛의 차이, 묵은지의 익숙한 맛을 좋아하지만 겉절이를 갓 만들었을 때의 신선함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오늘 나는 첫 물 생강차를 마실 수 있다. 같은 듯하지만 매일 아침 시간은 이렇게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늘 같은 일상이지만 같은 날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오늘은 늘 처음이다.


개미 쳇바퀴 돌듯 똑같은 일상 같다가 일상이 깨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일상의 행복, 그건 아마 결핍에의 욕구에서 출발하는 것도 같다. 살아갈 날이 창창해 보일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어진 것을 실감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건 내 어리석음 소치일 수도 있겠다. 젊은 날 뜻을 세워 초지일관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도 많은 현실이지만 선조들이 소년 급제를 경계해 온 걸 보면 평범한 소시민의 삶은 대동소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늦게나마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챘으니 나로서는 다행한 일이다.


빈 둥지 증후군이라던가, 노후의 허허로움, 외로움들이 백세시대를 맞은 우리들의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길어진 노후 문제이다. 급 부상한 백세시대의 문제점은 노후 기간이 길어졌다는 것이다. 유년기, 성장기, 성인기들이 고루 조금씩 늘어났다면 나누어질 수 있는 짐들을 지금 은퇴한 사람들이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하다. 65세, 은퇴 이후의 삶만 길어졌다. 은퇴 후, 시간은 많아졌는데 의식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노후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정리하고 뒷전에 물러서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다. 노후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겠다


젊고 팔팔한 젊은이들이 오죽 잘해나가랴 믿고 싶지만 수적인 부족은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인해전술은 감당치 못하는 법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며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해서 우리는 지금 인구감소시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갑자기 없는 아기를 구해낼 도리는 없으니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백세시대, 늘어난 노인들이 있다. 뒷방 늙은이로 두지 말고 적국 활용해 볼 일이다. 다행히 의학이 발달하여 건강한 늙은이들이 많아졌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소중한 날들일 수밖에는 없다.


갓 끓인 생강차도, 오래 졸여내 진국이 우러난 묵은 생강차도 고유의 맛은 있는 법이다.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이 필요할 뿐이다.

생강차를 끓이며 혼자 즐기는 이 시간이 소중한 것은 아침이 오면 다시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까닭이다 . 혼자 만의 시간이 소중한 것은 같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고산다. 결핍을 느껴야 비로소 가진 것에 대한 고마움을 깨우치게 된다.

첫 물 생강차와 끝물 생강차가 다르지만 똑같이 소중하다 . 나는 오늘 첫물 생강차를 혼자 마시며 누구에게나 똑같이 처음인 오늘을 맞이 한다. 같이 할 사람들이 있어 그들 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혼자있는 지금 시간이 소중해진다.

첫물 생강 차가 제 소임을 다하며 단련되어 끝물 생강차가 되는 것처럼 처음 부터 노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고 늙지 않는 사람도 없다. 누구에게나 처음인 오늘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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