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고공 행진을 하던 딸기 가격이 주춤하다. 도시의 인색한 봄은 딸기 가격으로 겨우 감지된다. 냉이, 쑥,같은 봄철 나물들은 이제 제철을 가리지 않고 마트에 진열되어 있다. "노지 딸기야!" 친구의 들 뜬 목소리에 순간 무안해졌다. "시대가 달라졌잖아." 혼잣말을 해보지만, 노지 딸기에서 봄을 느끼는 친구와 가격변동으로 계절의 변화를 인식하는 나는 다르다.
"이거 농사지은 거야, 시골에서 금방 따온 것들." 고추, 호박, 오이, 검은 비닐에 쌓인 푸성귀를 내밀려 친구가 말한다. "농사짓지 않은 채소도 있니? 마트에서 파는 것도 다 농사지은 거야." 입은 함박만 하게 벌어지면서도 내 말은 퉁명스럽다. 제대로 감사함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못난 버릇이다. 정성을 다한 음식을 대접하면서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이라고 겸손해 하던 옛 어른들의 태도가 몸에 밴 탓인 듯하다 . "정성스럽게 차렸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 하는게 듣기 좋지만 말을 앞세우는 것 같아 겸연쩍다. 시대의 흐름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하는 아둔함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정도는 아니더라도, 행동을 내세우지 않는 게 겸손이라 여겼다. 칭찬은 남이 해주고, 받은 칭찬도 돌려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수상 소감은 '부족한 제게 정진하라는 격려의 말'이 정석이었다. 노력의 결실을 겸손으로 포장했지만, 교만일 수도 있다. 최선을 다했으나 수상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길 수도 있다. 성취 동기를 만족시키고 싶은 마음은 본능이지만, 경쟁을 부추길 수도 있다.
아직 새내기 글쓰기 연습생이니 우물안 개구리를 면하고 싶었다. 일반인도 참가가 가능한 독후감 공모전에 도전을 결정했다. 마침 작가의 글을 읽다가 내 어머니가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 감정을 글로 옮겨 보고 싶었다. 문우들의 독려에 힘입어 어렵게 쓰긴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문우에게 합평을 부탁했더니 . "괜찮네, 나도 쓰고 있거든, 우리 둘다 응모하면 우리끼리 경쟁하게 되니 이번엔 내가 낼게, 내거 완성되면 보여줄테니 읽어 보고 네가 양보해 주면 좋겠어" 자신있는 친구의 태도에 일순 주눅이 들었다. 친구에게 양보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실 나도 어렵게 한 결정이었다. 입상이 목표라기 보다는 경험을 쌓고 싶었지만 목적없이 쓰는 글보다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포기하기엔 아깝다는 욕심이 순간 일다가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이건 누가 양보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듯 당연한 일이다. 꽃이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 일은 피고 난후의 일이다. 피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딸기 가격으로 봄을 인지하는 도시인의 봄처럼 경쟁을 일삼는 일이다.
헐거워진 딸기 가격에서 봄을 보는 가난한 봄맞이를 변명하고 있는 중이다. "노지 딸기야." 친구의 봄이 사랑스러웠다. 호미 자루 팽개치고 섬진강 매화 보러 가는 시인이 그리워진다. 오늘은 일상 작파하고 가까운 들과 산으로 봄맞이를 가려 한다. 마음 같아서는 호미 자루 손에 쥐고 싶으나, 요즘은 산과 들에서도 식물 채취를 금지한다.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서운하지만 당연하다. 씨 뿌리는 노력 없이 수확만 챙기려는 건 욕심이다. 산과 들도 주인이 있고 애써 관리해 온 그들의 몫이다. 글쓰기 연습도 이와같다. 각자의 노력이 있을 뿐이다. "농사짓지 않은 농산물도 있니? 마트에서 파는 것도 다 농사지은 거야." 퉁명스러웠던 내 말을 친구는 값진 걸 받은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라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산과 들을 헤매는 대신 오늘은 작정하고 친구의 텃밭을 가봐야겠다. 바쁜 봄 일손을 돕고 싶다. 서툰 손길이지만, 속마음을 친구는 알아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