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부영업사원 1
2월의 바람은 매서웠다. 한파 때문 만은 아니었다. 각자 자기 사무용품 꾸러미를 들고 거리로 내몰린 직원들의 거처를 다시 정해야 했다. 몇 달 동안을 같이 일해 온 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려 일 한대가를 제대로 지불받지 못했고 반환금도 제대로 정산하지 못한 채 우리는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비교적 우리가 일하는 조건과 맞는 회사를 찾아왔건만 회사의 규칙은 우리의 입장까지 수용할 수 없다는 차디찬 대답이었다. 오라는 곳은 많지만 갈 곳이 없는 신세랄까?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를 주시하는 직원들을 보니 2월의 찬바람이 더 거세기만 한 듯하다.
"왜요? 부장님, 잠깐 사무실로 들어오세요"
총무팀과 입사조건 조율이 어려워져 직원들을 독려하며 막 자리를 뜨려던 참이었다. 때마침 회사로 들어오던 안사장과 마주쳤다
"그래요?, 그런 사정이 있으시구나, 그럼 선불로 하시지요, 총무과에 얘기해 놓겠습니다"
스산하던 직원들의 표정에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 리쉬긴 했지만 아득히 먼 갈 길이 보이는 듯했다. 당장 비바람을 가린 거처가 마련된듯하지만 빚더미에 올라앉은 형국이었다
영업조직에서 판매 성과는 수입과 직결되는 엄격한 잣대였다. 전달 영업 목표 치는 무사히 넘기나 했는데
뜻밖의 환불 사태로 우리는 이미 지급된 영업수당까지 환불하여야 했고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 조직의 급여는 없었다. 제품의 하자로 인한 환불 사태이니 영업사원들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큰 손해를 입어 회생이 어려운 회사의 처분만 바라기엔 우리의 처지는 다급했다. 어렵게 생활전선에 뛰어든 주부사원들이다.
각기 사연은 달랐지만 ' 아무런 준비 없이 영업 세계에 뛰어들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는 대동소이했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살얼음판 같은데 서너 달 급여가 동결되니 각자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직원들을 독려하여 새 일자리를 찾고는 있지만 결과만으로 평가되는 영업 세계에서 선불을 요구하는 우리를 선뜻 받아주는 회사는 쉽지 않았다. 선선히 선불을 약속해 준 안사장에게 우리는 처음부터 빚을 안고 일을 시작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책임자인 나로서는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직원들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웬만한 풍파는 겪어 온 주부사원들이니 이런 처지를 모르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더 노력하여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결의를 보여주며 나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새 조직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먼동이 트기 전 2월의 바람은 매섭지만 콧날이 찡한 건 매서운 바람 때문은 아니었다.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학업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학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힘든 아르바이트를 감행하는 어린 대학생 딸에게 거친 사춘기를 보내는 남동생을 맡기고 출근하는 길이다. 회사를 옮기느라 비교적 일찍 퇴근한 지난밤 아들의 침대 밑에서 발견된 갈가리 찢긴 청바지처럼 내 마음도 갈가리 찢기는 듯하다. 아들의 방황을 눈치채기는 했지만 당장의 생활이 걱정인 내게 아들의 방황은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의 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심성이 착한 아이이니 딸처럼 별 무리 없이 사춘기를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찢긴 청바지에서 무능한 엄마에 대한 아들의 반항이 의외로 심각해 보여 밤새 뜬눈으로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모진 세월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도망치듯 이혼을 감행하였으니 당장의 생계가 막연한 나로서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다. 문을 잠가 놓은 방에 두 아이를 가둬놓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두 아이를 먹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먹여 키우는 일, 그 외에는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은연중에 아이들에게도 그런 처지가 각인된듯하다. 별 말썽 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이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이들의 마음에 그런 분노가 쌓일 수 있다는 걸 간과했나 보다. 애써 쌓은 성이 모래성이 되는 것 같았다. 다시 모질게 마음을 먹는다. 분노에 찬 아들이라도 먹여야 한다. 먹고 입히고 가르쳐야 분노를 삭일 수 있는 기회도 잡을 수 있다. 첫 출근을 하는 회사에 첫날부터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출근을 서둘렀다.
따스한 실내로 들어선 순간 아직 남아 있는 몸 안의 냉기가 반응하여 안경알에 희뿌연 김이 서린다. 안갯속처럼 희미해진 실내에서 감지되는 낯 설움.
"새로 온 부서래, 선불이라더라,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 오래 근무한 우리도 안 해주는 선불을 받았대"
소곤대지만 들어 보라는 비아냥 같기도 했다
"부장님, 일찍 오셨네요, 이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총무과 여직원이 자리를 안내해 준다. 출입문 앞자리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자리이다. 직원들의 불평이 따르긴 하겠지만 불평을 할 게재는 못된다. 실적이 없는 한 출근을 했다 해도 정식 직원이 아님을 직원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첫 실적을 올려야만 비로소 회사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건 모든 영업사원의 불문율이다. 더욱이 우리는 선불을 받았다. 기존 직원의 눈초리가 따가울 수밖에 없다. 첫 실적을 올라는 일에 우리 부서의 사활이 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