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같이 범속한 사람은 봄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무겁고 둔한 옷을 벗어버리면 그만이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주름살 잡힌 얼굴이 따스한 햇볕 속에 미소를 띠고 하늘을 바라다보면 곧 날아갈 것만 같다. 봄이 오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피천득 님의 수필 '봄 '의 한 구절이다. 무거운 옷을 벗고 하늘로 날아갈 것 만 같은 봄,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은 봄, 피천득 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봄이 행복한 이유이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기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님의 윤사월 시,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이처럼 애절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 시인의 언어는 특별하다.
'꽃이 피면 환장하겠어요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가요' 어느 토크쇼에서 70세 무렵의 엄앵란 님이 한 말이다. 여배우의 특별한 감성이겠거니 했는데 봄아 되면 어느새 밖으로 뛰쳐나가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70세 무렵부터이다. 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귀한 것이 사랑받는 것처럼 이제 얼마 남지 않는 봄이기에 나이 들면 더 애틋해질 수도 있겠다.
'인생의 마지막 봄' 우리 어머니의 봄이 그러했다. 어머님은 98세 봄에 벚꽃처럼 홀연히 떠나셨다. 벚꽃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날이었다.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 우리 어머니의 투병이 시작되었다. 평소의 건강을 믿었기에 우리는 사나흘이면 털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이번 일 리는 없을 것 같았다. 한두 번쯤 우리에게 어머님을 보살필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 만개한 벚꽃을 보던 날 문득 우리 어머니는 벚꽃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도리질을 쳤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 같았는데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 나고야 말았다. 98세 어머님의 영면은 마치 벚꽃 같았다. 일시에 피고 지는 꽃처럼 갑자기 찾아오더니 홀연히 떠나 버리셨다.
이 봄 우리는 어머님의 첫 번째 기일을 맞았다. 해마다 벚꽃이 피면 우리는 어머님을 더 그리워할 것이다. 시간이 가면 그리움이나 슬픔이 약해진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움은 마치 고래의 자맥질 같다. 수면 아래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솟구쳐 오른다. 솟구쳐 오르는 힘은 그때그때 다를 뿐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안 계셔도 우리는 여전히 밥 먹고 잠자고 웃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어머니를 떠나보내지는 못한다.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문득문득 솟구쳐 오른다. "살아계실 때 잘할 일이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뼈마디가 녹고 애간장이 타는 듯하다. '왜 조금 더 잘하지 못했을까? 벚꽃 한 번 더 보여드릴걸' 절절한 회한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건 아마 우리의 설움일 수도 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누구나 한 번은 가는 길, 어머님은 어머님답게 떠나셨다. 누구나 행복한 봄에 문설주에 기대고 엿듣고 싶은 가슴 저미는 그리움을 우리에게 남기고 벚꽃처럼 미련 없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슬픔과 그리움을 남기셨지만 기꺼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어머님이 안 계신 봄이 슬프지만은 않다. 슬픔만큼 그리움도 크다. 그리워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고래의 자맥질처럼 거세게 솟구쳐 오르는 그리움을 감당하며 그리워할 어머니가 있음이 축복이라 생각한다. 축복을 누릴 수 있으니 행복하다. 벚꽃 피는 봄날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