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전무 이야기
영업회사의 중역을 맡아 힘들어하고 있는 노전무를 만났다 남자 임원들 속에서 연일 술자리에 시달려야 하는 그녀가 몹시 안타까웠다. 고등학교 재학 중인 딸을 키우고 있으니 일각이 새로운 지경인데 단합을 한다는 명목 아래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에 매어 있곤 했다. 다행히 중간 간부인 부장들은 임원들의 술자리까지 동석할 의무는 없었고 회사는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 직원이나 부장들도 별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그녀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이런 정도의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영업회사는 많지 않았다. 일만 열심히 하면 정해진 급여와 수당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짜여 있었다. 무사히 첫 계약을 마치고 둥지를 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노 전무가 나를 불렀다. 다른 임원들과의 갈등이 깊어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하소연을 하며 작은 회사지만 총괄을 맡아 가기로 했으니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부탁을 해왔다. 첫 계약은 빼서 새 회사로 돌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영업회사의 조직은 자리를 잡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임원들은 유능한 부장들을 서넛씩 데리고 다니는 게 상례였다. 한참 예민한 고등학생 딸을 돌봐야 하는 그녀의 처지도 이해가 되었고 못 마시는 술자리의 불편함을 잘 아는 나는 같은 조건이라면 그녀를 돕고 싶었다. 부서 직원들도 별 불만 없이 따라 주어서 우리는 그녀를 따라 새 회사를 찾았다.
기존 부서가 4부서였고 나와 다른 부장 한 명을 노 전무가 영입해 6개 부서의 조직이 갖춰져 있었다. 노 전무는 나를 수석부장이라며 극진히 대우를 했고 부서의 계약도 순조롭게 이동이 되어서 순탄한 출발이었는데
기존 부서의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창가에 앉은 우리 부서에 창문을 닫아라 열어라부터 전화 목소리가 크다는 불평을 하기도 하고 첫 계약은 전 직원 점심을 사야 한다는 둥, 여러 가지 규정을 들어 직원들을 괴롭혔다. 전무는 부장들을 단합시킨다는 명목으로 퇴근 후 술자리를 만들었다. 근처의 7080 술집부터 멀리 라이브 노래방까지 연이은 술자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노 전무는 취하기 시작하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중간에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벌금을 내게 하는 등의 강요도 있었으니 나처럼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고행길이었다. 집이 멀어 툭하면 막차도 놓치니 택시비도 만만치 않았다. 노 전무는 술자리를 아주 즐기고 있었다. 고등학생 딸을 운운하던 그녀의 말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술자리를 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를 했다.
노 전무뿐만 아니라 술을 즐기는 기존 부장들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술자리에서의 간단한 험담 이라면 개의치 않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개인의 인신공격과 음해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천하의 요부가 되었다가 남편을 폐인으로 만든 악처가 되었으며 아이들을 학대하며 키운 모진 어미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학비는 안 주면서
나는 비싼 플루트 레슨을 받고 있다는 구체적인 루머까지 떠돌았다.
가능한 한 직원들에게 피해를 안 주면서 회사를 옮길 궁리를 하는 중인데 회장이 나를 불렀다.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에 대한 부장들의 불만을 듣고 있다며 노 전무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한 번쯤 기회를 더 주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수석부장인 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서원들을 두고 혼자 떠나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계약이 있는 부서의 부서장은 해임이 안되는 게 영업 회사의 불문율이 있었지만 회장은 유능한 직원들을 빼앗고 싶어 했다. 계약을 한 직원들은 높은 기본급을 받을 수 있으니 나도 직원들에게 손해가 가게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들이 입대를 하게 되어 회사를 당분간 쉬어야 한다고 핑계를 대며 직원들을 다독여 눌러 앉혔다. 회사를 떠난 후에도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 부서 직원들을 회유하기 위해 나를 천하의 몹쓸 년으로 만들고 있었다. 알고 보니 알코올 중독의 전력이 있었다던가, 부서에 나오는 시상을 착복했다던가, 우리 직원들의 흉을 보고 다니더라는 터무니없는 말들이었다. 부서원들은 그런 소문을 전하면서 아무도 믿지 않는 말들이니 개의치 말라는 위로까지 곁들였다. 한 달 급여를 탄 후 우리 직원들은 모두 나를 따라 나왔다
강 부장은 나의 입장도 잘 이해해 주는것 같았다 암암리에 험담을 하며 이 이사 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눈치가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 둘의 신뢰관계는 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이 이사에게 섭섭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견해 차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강 부장의 입사 이후 잠시 활기를 찾는 듯하던 회사 분위기는 얼마 안가 다시 침체되기 시작했다. 50억 재고 처리가 이런저런 사유로 지연되기 때문이었다. 결정은 되었으나 예산 집행 중에 문제가 생겼다는 둥, 서류 미비로 다시 결재서류가 올라갔다는 둥,결재과정에 시스템이 바뀌어 다시 서류를 올려야 한다는 둥, 그때마다 그럴싸한 이유가 붙었다. 한두 번은 진심으로 아쉬워할 수 있었지만 곧 우리는 양치기 소년에게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임원생활 경험이 있는 강 부장은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회사의 어려운 재정상태로 알았고, 무능한 임원진,
애매한 내 처지를 보며 자신이 살아 나갈 길을 찾은 것이다. 과거의 경력이 화려했다 해도 이제는 늙고 다리도 다쳤고 귀도 어두운 자신을 받아줄만한 회사는 없었고 자신도 예전처럼 심혈을 기울여 일에 매진할 수 있는 건강 상태는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만 공을 세우면 자신의 입지가 살아나리라는 확신이 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이사에게도 곰살맞게 굴기 시작했고 신전무를 따돌리는 언사를 서슴치 않았다. 신전무는 강부장을 잡기 위웬만한 일은 강부장의 의사대로 관철시키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강부장은 임원 위에 또하나의 임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