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땡땡이 우산이다.
좀 낡긴 했지만 색도 예쁘고 제법 튼튼했다
" 이 우산 버려도 돼, 오래 썼거든"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 난처해하던 내게 옆 동료가 챙겨준 우산이다
삼단으로 접혀 가방 속에 쏙 들어가니 들고 다니기도 편했다
버리기 아까워 핸드백 속에 그냥 넣어 두었는데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효자 노릇을 하던 참이었다
"이거 내 거네, 빨간 땡땡이,"
우산 꽂이에 들어 있던 우산을 꺼내려는데 후배가 먼저 내 우산을 집으며 말했다
"어? 그거 내가 쓴 건데"
"언니 거야?"
"내건 아니지만, ···"
"거봐 내 거라니까, 내가 백화점에서 산 거야"
"이건 낡았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후배는 우산을 들고 가버렸다
석연치는 않았지만 어차피 버릴 요량이었다.
소나기는 그쳤고 더 이상 비가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니 아까 그 후배가 빨강 땡땡이 우산을 두 개 들고 서 있었다
"이게 내 거네, 어쩐지 낡았더라"
후배는 낡은 우산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어? 어~"
팽개치다시피 우산을 내게 떠 맡기고 가버리는 후배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 저런 게 있어? 제 거라고 빼앗다시피 가져가갈 땐 언제고···, 언니는 속도 좋다, 저걸 그냥 둬"
옆에서 보고 있던 후배가 말했다
"그래도 미안한 표정이었잖아, 저도 얼마나 무안했겠어" 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표정은 무슨,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했어야지, 무례하잖아, 내가 화가 나네" 후배가 씩씩거렸다
무안해서 그냥 가버린 거라고 이해하고 싶었지만 서운하긴 했다
"미안해" 한마디 정도는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나도 입에 발린 말은 못 하는 편이다.
말보다는 진실한 행동이 낫다며 말로 표현하는 것에 인색한 편이다
하지만 말은 해야 맛이다
미안해하는 표정을 봤지만 그걸로 마음이 풀리지는 않는다
나로 인해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면 불편하더리도 표현해야 한다
사회생활의 예의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도리이기도 하다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기 힘든 일이기는 하다
친할수록,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말들은 하기 힘든다
서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알고 있는 것과 서운한 마음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관대해지려는 사람의 속성 때문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셋째 고모님 생각이 난다
고모님은 조카들과 친했다
조카들은 저마다 자신이 고모님과 제일 친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고모님 성정 때문이기도 하고 고모님이 자주하시던 말 때문이기도 하다
그걸 깨닫게 된 건 고모님의 사후 발견한 일기장 때문이다
고모님은 매일 쓰는 일기장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시작하고 있었다
고모님의 일기장을 발견한 우리들은 다시 장례식장을 울음바다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고모님을 향한 그리움이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고모님의 손주들과 외아들 성진이, 조카들이 다 같이 하나가 되어 고모님을 기릴 수 있었다
일기장에 써 놓은 그 말들은 평소 고모님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 말들 덕분에 우리는 각자 고모님과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겠다
우리 모두가 고모님께 특별한 사람이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때문이었다
알면서도 하지 못했던 이런 말들을 고모님은 자주 우리에게 해주셨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리면 오가는 이 모두 흙으로 보는 것과 같다
흙먼지 털어내야 제대로 예쁜 옥이 된다
나도 말에 쌓인 쌓인 흙먼지 털어내야 한다
그동안 쌓아 놓은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를 풀어야 한다.
흙먼지가 굳어지면 털어내기 힘들어진다
옥이라 한들 옥일 수 없다
고모님의 옥은 늘 쓸고 닦아 누구보다 찬란히 빛 날 수 있었다
빨간 땡땡이 우산은 아직 내 신발장 옆 우산꽂이에 얌전히 꽂혀 있다
드나들 때마다 '미안해'하지 못한 말들을 반성해 본다
'고맙다 미안해 사랑해' 이런 말들은 할수록 맛있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