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내 마음 속 불씨 하나

by 우선열


서른셋에 요절한 작가 전혜린처럼 살고 싶었다.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사라지는 삶, 그게 열정이라 믿었다. 혜은이의 노래 ’열정 ‘속 가사처럼 ’가슴 태우듯 열망하는 사랑 / 사랑 때문에 목숨 거는 사랑 / 같이 있지 못하면 참을 수 없고 / 보고 싶을 때 못 보면 눈멀고 마는 그런 사랑/ 그런 삶을 꿈꾸었다.

그러나 삶은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절감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그 둘 사이의 현명한 타협임을 깨닫게 되었다. 추구하는 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깎이고 다듬어지며 비로소 현실에 안착하게 된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상태로 달아올랐다가 재가 되어 사그라진다면 삶을 지탱하기 어렵고 사랑의 의미도 상실된다. 달리기를 할 때 시작할 때의 팽팽한 긴장감만으로는 완주할 수 없다. 끝까지 달리려면 자기 페이스를 찾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사랑도 다르지 않다. 첫 만남의 설렘은 오래가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래 참고 상대방을 인정하며 함께 성장할 때 진정한 사랑이 깊어진다, 젊은이들의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사랑이 부럽기는 해도 그것을 완성된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숭고하고 근사한 사랑은 역시 모성(母性)이다. 생명에 대한 경이에서 오는 원초적 사랑의 힘. 오래 참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때 비로소 참사랑이 된다.

일 또한 사랑과 같다. 태어날 때부터 잘할 수는 없다. 수없이 연습하고 부딪치며 비로소 원하는 궤도에 오를 수 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글을 잘 쓰는 아이였다. 교내 백일장은 물론 도 백일장에서도 수상을 휩쓸어 봄가을 백일장이 열릴 때마다 내 이름 석 자가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중학교 입시와 함께 입시 지옥에 시달리면서 글 잘 쓰는 아이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교과목 점수만이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잣대가 되었다. 글쓰기는 내게서 멀어졌지만 오만은 남아 있었다. '쓰지는 않지만 언젠가 쓰기만 하면 좋은 글을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과 ‘언젠가는 꼭 써 보리라'는 희망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글쓰기 앞에 섰다. 문제는 잘 쓰고 싶었으나 그리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는 글 잘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한때 글쓰기를 꿈꾸던 문학소녀였을 뿐이다. “나도 한때는 문학소녀였어” 친구들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자존감이 무너져 차라리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펑펑 울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내 안에 아직 작은 불씨 하나가 살아있음을 보았다. 순식간에 타오를 수 있는 활화산 같은 불꽃은 아니지만, 가슴 속에 불씨 하나는 오래도록 꺼지지 않고 살아있었다.

나는 뒤늦게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좋은 글을 척척 써내는 작가가 아니라 글쓰기 연습생이 되었다. 가끔은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살리에르의 심정이 되어 부족한 재능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타오르는 불꽃도 있고 은은한 불씨도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다. 각각 역할이 다를 뿐이다.

모니터 앞에서 독수리 타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모습을 본다. 일필휘지, 펜을 휘두르는 모습이 아니라 서툰 타자 솜씨로 나만의 글을 써 내려간다, 그 문장들 속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먼 길을 돌아오며 나를 살게 한 진정한 열정은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꺼지지 않고 은근히 지탱해온 불씨의 힘이었다. 이제 나는 활화산처럼 타오를 힘도 없고 목숨을 걸 만큼 격렬한 삶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어떤 시련이 와도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는 간직하고 있다. 그 불꽃은 남은 생애 동안 은근하게 불타오를 것이다. 순간적으로 타올라 재가 되어버리는 젊은 날의 열정과는 다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키고 숙성시켜 온 은근하고 끈끈한 힘이다. 느리고 힘겹더라도 꺼지지 않고 은은하게 타오르는 정열로 남을 것이다, 내게 열정은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씨이다. 내 안에서 자리 잡은 작자만 단단한 불씨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