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어나세요, 밖으로 나가야 해요" 아들이 깨우는 순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소방점검인가 했더니 대피 명령 방송이 아파트 전체에 울렸다.
"불났어?", "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 봐, 옷만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해"
나는 허둥지둥 정신을 못 차리는데 대학생 아들은 오히려 침착했다
물젖은 수건을 내게 내밀었다.
초저녁잠에 빠져든 날이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는 겨울 초입이었다.
허둥지둥 잠옷에 두터운 패딩 옷 한 벌 걸치고 아들의 손을 잡았다
밖으로 나오니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불 길은 잡혔대, 잔여 불씨 점검하고 있대요"
"큰일 날뻔했네요 옆집으로 번졌으면 어쩔 뻔했어요"
우리 건물 15층 2~3호 라인쯤 되는 집이 검게 변해있었다
불길이 잡혔다니 다행 같기도 하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주방 가스 불 때문이래요, 켜 놓은 채 잠들었대요"
"다행히 일찍 발견한 거 같은데"
"창밖 벽이 저렇게 까매진 걸 보면 제법 불길이 거셌었나 봐요"
"어휴 불조심해야지 아파트에서 불나면 큰일이지요, 전체에 옮겨 붙을 수 있잖아요'
'다행히 옆집으로 번지지는 않은 것 같지요?
"요즘은 소방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옆집으로 번지지 않게 방화벽이 있대요"
" 만일에 대비해서 베란다 가벽 주변을 터놓아야 한대요"
바깥벽이 검게 그을릴 정도라면 내부는 거의 타지 않았을까?
저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연기도 열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ㄱ 자로 구부러져 있기는 하나 우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집이다.
연기가 새어 나왔음직 한데 전혀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대피할 때 복도에 매캐한 느낌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초겨울의 추위 때문에 코끝이 반응하는 줄만 알았다
물에 젖은 수건을 준비한 걸 보면 아들은 어느 정도 기색을 알았나 보다
아들 방이 복도에 면한 방이나 문틈으로 연기가 스며들었을 수도 있겠다
초조한 시간이 30분쯤 흘렀을까
마지막 점검까지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초겨울 추위에 '담요라도 한 장 가지고 나올 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이런저런 소문으로 시끄러웠다
"혼자 사는 노인이래요"
"얼마나 곤히 잠들었으면 이지경이 되도록 몰랐을까?"
집 안으로 들어와서도 한동안은 안정이 되지 않았다
추위에 얼었던 몸이 녹느라 노곤해졌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다음 날부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일상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날의 공포는 잊히지 않는다.
아들은 현관문 앞에 매직펜으로 굵게 '가스 불조심 "이라고 써 붙였다.
외출할 때마다 몇 번씩 가스 불과 난방기기를 점검했으나 발자국을 뗄 때마다 불안했다
제대로 끄고 나왔는지 확인하러 몇 번씩 드나들곤 했다.
아파트 측에서도 가스 안전장치 점검을 하고 자동 차단 장치를 권유했으며
집집마다 소화기를 배치했다.
7~8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우리 집 현관에는 아직도 아들이 써 놓은' 불조심 '표어가 붙어 있다.
아들이 독립하면서 다시 써 붙인 글이다
태연한 척하던 아들도 실은 몹시 놀랐었나 보다
혼자 남을 엄마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겠다.
세월이 흐르며 이제 조금 해이해졌는지 가끔 조리 시에 냄비를 태우기도 한다
까맣게 탄 냄비는 닦기도 힘들다.
베이킹파우더와 식초를 넣어 끓이고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야 한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새까맣게 그을린 냄비 하나는 닦지 않고 탄 채 주방 구석에 두었다
조리를 할 때마다 냄비를 보며 그날의 일을 떠 올린다
백번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은 불조심
한번 실수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