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잔의 위로

by 우선열


날씨가 쌀쌀해지면 제일 먼저 따스한 차 한 잔이 생각난다. 허기를 채우는 음식과는 달리 차 한 잔은 마음을 먼저 데운다. 찰 칵, 가스 불을 켜면 작은 불꽃이 살아나며 반짝 내 마음에도 등불 하나 켜지는 듯하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찻물은 김으로 퍼져 주변 공기를 먼저 데운다. 온기야 알듯 모를 듯 미미하지만 김은 풀어헤친 젊은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풍성하다. 이때쯤이면 추위에 꽁꽁 얼어붙은 몸이라 할지라도 무장 해제 당한 듯하다. 동동 구르던 발소리도 잠잠해진다.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손으로 감싸 쥐면 손끝에서 퍼져 나가는 온기. 마음이 먼저 따스해진다. 한 모금을 입안에 담으면 목울대를 따라 스며들 듯 퍼지는 따스함. 얼어붙었던 마음도 같이 녹는다.

추위를 좋아하는 이야 많지 않겠지만 나는 유난히 추위에 약한 편이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의기소침해지고 몸도 마음도 움츠러든다. 잔뜩 움츠린 자세가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어깨와 등이 구부러지니 움직임도 줄어든다. 새벽을 좋아하지만 첫추위의 새벽에는 옹송거리는 몸을 추스르기 버거워진다.

이럴 때 나는 차를 끓인다. 차 끓는 소리가 응원가가 되고 따스한 차 한 잔은 얼어붙은 몸과 마음에 활력소가 된다. 일 년 중 차가 가장 좋은 계절이다. 첫추위에 여름내 미루기만 했던 생강차를 끓였다.

올여름엔 유독 게을렀나 보다. 새벽에 마시는 차 한잔 마련하기도 버거웠다. 게을렀다기보다는 오가는 심사를 다스리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은은한 차 향 대신 자극적인 커피 향에 익숙해졌다. 몸과 마음에 자극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극은 아픔을 동반하고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결과가 나빴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세속의 의미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만하면 괜찮은 결과 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번 겨울엔 따스한 차 한 잔이 유독 그립다. 진한 커피 향에 익숙해진 마음을 덜어 내고 싶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커피 향에 취해 주변에 먼저 퍼지는 차향의 은은함을 잊고 있었다. 물만 살짝 끓이는 커피가 아니라 오래 끓여야 하는 생강 차이다. 정성이 꼭 시간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오랜 시간 숙성시켜 온 것들에는 그만큼 녹아드는 것들이 있다. 잠시의 위안이 아니라 내면화된 충족감이다.

추위에 약하여 움츠러들던 몸과 마음을 녹여 주던 생강차는 세상의 한파에서 나를 지켜주던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진한 커피 향에 취해 잊고 있었다. 세상사 혼자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알게 모르게 주변을 지켜 주던 사람들이 있다. 그 따스함을 잊지 않겠다.

은은하게 주변을 감싸는 생강차 향기. 추위에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을 녹여준다. 나를 허기지게 했던 것들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정성껏 준비한 차 한 잔을 나누려 한다. 차 한 잔에 담긴 행복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