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보내며

by 우선열


'아직 한달이 남았다' 11월 달력을 보며 잠시 " 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하던 이순신 장군처럼 비장한 마음이 되어 본다. 모질지 못하여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여심이니 와신상담 같은 확고한 줏대가 서 있는 것도 아니련만 공연히 마음만 심란하다. 이제 다음 달이 시작되면 자의 건 타의 건 연말 분위기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해 놓은 것이 없건만 " 하는 푸념과 상관없이 한 해를 마감하는 소회를 감당하며 새로 맞이할 새해를 준비해야 한다.

앞만 보고 달리던 젊은 시절과 조금 다르기는 하다. 그 시절엔 의무와 책임에 매여 있었으니 하고 싶은 일보다는 늘 해야 하는 일이 먼저였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다. 바쁘고 고달팠으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었다는 말이다. 재능이 넉넉지 못하여 분주하기만 할 뿐 별 소득은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치열했던 젊은 시절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멈춰 설 수 있는 것도 앞만 보고 달려온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비록 가진 것 없이 초라하게 서 있을지라도 달려온 거리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를 돌아 볼 여유가 생겼으니 나이 듦이 나쁘지만은 않다.

예전 같으면 '종심'이라 하여 삶을 마감할 단계라 하지만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평균 수명이 늘어 100세 시대가 되었다. 살아갈 날이 30년 덤으로 얹혔다. 늘어난 세월이 노후에 집중되어 준비하지 못한 당혹감은 있다. 영리한 사람들은 미리 준비를 했겠지만 천성이 미욱하고 맺힌 데 없어 흐르는 대로 떠 밀렸을 뿐인데 30년 세월을 감당해야 한다. 잠시 나침반 없는 조각배로 망망대해에 내팽개 쳐진듯했다. '준비 안된 노후는 재앙'이라며 불안에 떤 것도 사실이지만 "산 입에 거미줄 치랴" 하는 낙천적인 기질도 있다. 의무와 책임에서 놓여난 홀가분함을 느끼며 비로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보였다.

그 길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 글을 쓰면 돈이 나와 밥이 나와?, 현실 도피 아니야?'"하는 매서운 질책 앞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다행히 65세 이상 복지혜택이 있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나이 듦의 여유도 한몫했다. 현실을 받아들이니 젊은 시절처럼 치열하지 않고 앞서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하는 일처럼 떠밀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다시 12월을 맞는다. 계절을 보내는 소회야 나이 듦이 해결할 수 없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잡을 수는 있는 나이이다. 11월은 이렇게 보내려 한다.

이제 12월 맞을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예외 없이 다사다난했던 2025년을 정리하고 2026년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2025년은 그동안 쌓아온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등단과 두 번의 공모전 수상. 미미한 결과긴 하지만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갈래 길에서 한 길을 택하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는 있기 마련이다. 그 후회를 줄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5년은 그런 확인을 할 수 있던 해였다. 2026년에는 좀더 자신 있게 앞으로 나가 보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