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 11월 말쯤엔 마음이 바빠진다. 떨어지는 낙엽조차 갈 길을 재촉하는 듯하다. 아직은 한 장 남은 달력이 위로가 되기도 하고 초조해지기도 한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노래한 릴케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11월이 가기 전에 무언가 이루어 놓아야 할 것만 같다. 남은 12 월은 정리와 함께 새 계획을 세워야 한다. 실질적인 금년 농사는 11월에 끝을 내야 한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엉거주춤이다. 방향을 잃고 떠도는 돛단배 같다. 올 한 해는 '글쓰기 연습생'이었으니 무조건 연습만 하면 되었다. 잘하지 못해도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목표였던 등단을 하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한 해였나 싶은데 이제부터는 이름값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깨를 누른다. 갑자기 방향을 잃은 듯하다.
'잘 쓴 글보다는 좋은 글을 쓰고 싶어' 연습생은 그래도 되었다. 열심히 쓰다 보면 좋은 글이 되리라 믿었는데 작가라는 타이틀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 한두 작품만 우수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글이 70점 이상의 평점을 맞을 수 있어야 합니다 " 등단을 앞두고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다. 반짝 시험공부가 아니라 기본 실력이 쌓여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발표를 할 때는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SNS에도 발표된 작품은 신작이 아닙니다. 발표작이 되지요" 이 말씀이 쐐기가 되었다. 블로그와 브런치에서 마음 놓고 연습하던 글들이 발표작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습작이니 다음에 다시 고쳐 발표하리라' 마음먹었던 일이 물거품이 된다. 연습생일 때는 '설마 '하던 일이 실감되기 시작한다. '연습은 연습대로 발표는 신중히' 이론은 이해했는데 실제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수다히 연습해야 꽃 한 송이 피워 낼 수 있는 초보가 아니라 기르는 것마다 꽃을 피워야 하는 업보를 짊어지게 된 것만 같다.
무거운 짐 때문에 앞을 볼 수 없는 이번 11월이 되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지만 일단 일어서야 한다. 11월 이 이젠 지나가 버렸다. 12월에는 새해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방향을 잡아야 한다. 마음만 바쁘다. 이게 어찌 등단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는가? 해마다 11월에 겪던 갈등이다. 등단이라는 짐이 하나 더 얹힌 것뿐이다.
2026년의 항해는 조금 더 힘겨울 듯은 하다. 영혼의 무게를 알던 황진이의 심정이다. 내게도 등단이라는 짐이 하나 더 실렸다. 12월에는 짐의 무게를 간파하고 속도와 방향을 잡아야 한다. 너무 무거우면 배가 가라앉지만 적당한 무게라면 중심 잡기가 쉽고 가속도를 낼 수도 있다.. 2026년을 위한 새 항해를 위해 이번 12월에 해야 할 일이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하던 릴케의 심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