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따라 오는 귀소 본능

by 우선열

귀소 본능이 강한 편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해 떨어지면 안절부절 하며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어릴 적에는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자랐으며 청소년 시절에는 10시에 울리는 사랑의 종을 들었다. 오후 10시가 되면 라디오나 TV 할 것 없이 "청소년 여러분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하는 안내 방송이 일제히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이쯤 되면 귀소가 본능인지 학습된 것인지 불분명해지지만 나의 귀소의 의지는 이런 출처에 관계없이 뚜렷하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길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홈 시크를 심하게 앓는다. 저녁 무렵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가 정점이다. 붉은 저녁노을을 보면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지고 집에 대한 그리움이 붉게 물든다. 정열의 붉은색도 이때만큼은 강하기보다 아련해진다. 그리움의 정체 때문이다 그리움은 현재 진행형이라기보다는 과거 지향적이면서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단숨에 끝나는 그리움은 없다.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귀소의 안도는 잠깐, 다시 일상의 번거로움을 마주해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귀소의 의지가 약해지지는 않는다.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은 돌아올 곳이 있다는 만족감으로 이어진다. 집시의 자유가 때로 부러울 때도 있지만 누적된 피로를 떠안고 끝없이 떠돌 수 있는 자신은 없다. 귀소 본능을 만족시켜줄 집이 있어 행복하다. 나는 새도 둥지를 트는 걸 보면 귀소 본능은 모든 동물에게 부여된 숙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본능의 의지는 먹거리로 이어진다. 한참 젊은 시절 청춘 남녀가 짝을 찾아 헤매던 때, 데이트에서 돌아온 여자가 제일 먼저 양푼에 밥을 넣어 비벼 먹었다는 고백을 종종 듣곤 했다. 데이트에서 맛있는 걸 먹었건만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정신이 없고 집밥을 먹어야만 허기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귀소본능이 아닐까 한다.

요즘은 외식이 대세이고 한 걸음만 집 밖으로 나가면 온갖 먹거리가 유혹하는 시절이지만 구세대인 나는 아직은 외식이 집밥만큼 편하지는 않다. 테이크 아웃을 해가지고 와서라도 집에서 먹는 편이 편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물 한 잔이라도 마셔야 마음이 편해진다.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확인하는 절차가 된다. 음식은 누구랑 먹느냐가 맛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생각하는 엉터리 미식가이지만 집밥만큼은 혼자 먹어도 좋다. 많은 음식을 장만할 필요도 없으니 간단한 절차를 선호하지만 소홀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여러 사람의 취향을 고려하는 번잡함이 아니라 오롯이 내 취향만을 맞출 수 있어 만족감이 크다.

요즘에는 생강차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다. 심한 차멀미로 고생하던 내게 선배가 만들어준 생강차 때문이다. 벌써 오륙 년이 훌쩍 지난 일인데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곤 하니 미련이 많은 내 성정 때문이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도 있건만 곁에 있을 땐 그러려니 데면데면하다가 부재를 느끼면 아쉽고 그리워진다.

선배의 시니컬한 성격도 한몫하기는 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선배는 항상 떨어져 있는 듯했다. 공동생활의 배려는 전혀 없는 듯 자신의 일에만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자칫 소외되기 쉬운 성격이었지만 업적만큼은 나무랄 데 없이 우수해 집단에서의 위치는 단단했다.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던 선배가 차멀미를 하는 나를 위해 정성껏 만든 수제 생강차를 선물한 것이다

"그냥 집에 생강이 있어서요, 차멀미 한다기에 집에 생강차 만들어 놓은 것 조금 덜어 왔어요, 생강이 비장에 좋으니 차멀미에는 도움이 될 거예요" 마치' 오다 주었어' 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지만 선배가 정성껏 마련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선배의 생강차 때문인지 생강차를 마신 손발이 조금 따뜻해진 것도 같고 차멀미를 덜 앓는 것도 같다. 각자 은퇴 후 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으니 참 무심한 세월이다. 선배의 생강차가 새삼스레 생각난 것은 요즘 만난 인생 선배들 중 특별한 두 분 때문이다. 인복이 많아서인지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많으니 홍복이려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덜 성숙한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민망해지기도 한다. 언제쯤 나도 넉넉하게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선배님들은 "그냥 집에 있는 거 덜어 왔어요" 하며 생강차를 내밀던 선배 같다. 맛있는 식사를 사주기도 하고

배우기 시작한 에세이 때문에 속을 끓일 때도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데 마치 당연하게 해줘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두 분 다 공사다망, 시간을 쪼개어 쓰는 사람이건만 후배의 하잘것없는 투정에도 귀를 기울여주고 시간을 내어 준다. 하다못해 식사 대접이라도 해보고 싶건만 식사랑 찻값도 어느새 선배들의 주머니 차지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옥수수 차와 홍삼 차도 선배님들의 나눔이다.

마치 '오다 주었어' 하는 것처럼 주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간이 돈이야" 하는 분들이니 세속의 시간들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하다. 귀할 수밖에 없다. 그 귀한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세속적인 내 모습이 한심스럽기만 하지만 따로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미욱함을 탓해 볼 수밖에. 나는 이분들을 키다리 아저씨라 부른다.

나이 70이 넘어 만난 키다리 아저씨는 동화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동화 속에서는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지만 내 현실은 다르다. 고마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으로 안정을 찾는 것처럼, 어떤 대가를 치를 수가 없는 일이다. 외식의 화려함에서 보다 익숙한 집밥에서 받는 위로 같다고 할까?

생강차를 끓이면 선배들의 따스한 마음이 다시 피어오르는 듯하다. 데면데면한 성정을 핑계 삼아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하다가 가장 편안한 집에 돌아오면 키다리 아저씨들의 베풂이 새삼스럽다. 집에 돌아와 선배들의 사랑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시간이 귀해진다. 귀소 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본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지 않을까?

나이 70은 종심이라 하여 어떤 일을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니 본능보다 앞서는 것도 있다고 고집해 보련다. 귀소의 즐거움을 두 배 이상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라면 본능을 앞서는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귀소 본능에 누구보다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집에 돌아와 생강차를 끓이며 선배들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다만 아쉬움은 있다.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는'이보다 행복하다'는 청마 유치환 님의 시가 생각난다 나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