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바다

바다가 보이는 창을 읽고

by 우선열

윤형두 문학상 독후감 부문 수상작 입니다

윤형두 작가의 『바다가 보이는 창』을 읽으며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글에 배어 있는 겸손한 힘이었다. 화려한 수사로 독자를 압도하지 않고 잔잔한 물결처럼 스며드는 문장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힘이 있다. 글은 곧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 그의 글은 정직하고 담백하여 마치 사람 자체가 글 속에 앉아 있는 듯했다.

책 속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책에 대한 작가의 묘사였다.' 어떤 책은 수백 년의 나이테를 지닌 채 선비들의 손때에 절어 있었고, 어떤 책은 창포에 머리 감은 새 신부처럼 고이 싸여 있었다. 또 갓 출간한 신간은 푸른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처럼 퍼덕거리며 신선한 기운을 풍겼다.' 그 비유들은 책을 바라보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자 동시에 글에 대한 철학이었다. 바다 같이 넓고 깊은 한 사람이 내게로 오고 있었다

책상 위에 흩어진 원고지와 남겨진 커피잔, 새벽녘에 홀로 마시는 커피 한 모금의 풍경은 나의 삶과도 맞닿아 있었다. 나도 새벽에 커피를 마시며 글 앞에 앉는 시간이 좋다. 커피의 쌉쌀한 향과 함께 정신이 맑아지는 순간, 이 시간은 누구의 방해도 없는 어머니의 정한수 같은 간절함과 청정함이 깃들어 있는 시간이다. 글을 쓰는 이들이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만나고 삶과 마주할 수 있다. 작가의 고요한 아침 풍경 묘사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일면을 보듯 친근한 느낌이었다.

나는 뒤늦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삶의 여러 굴곡을 지나오며 한때는 글을 쓰는 일이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포기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을 꿈과 열정대신 현실의 의무와 책임에 묶여 보내야 했다. 나보다는 엄마나 아내, 가족과 사회인으로서의 삶이었다.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던 삶이었다 하더라도 내의지가 반영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자의던 타의던 그런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꼽으라면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아이를 낳고 키우던 시절로 돌아간다. 그시절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 간다면 감당해낼 자신은 없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내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의 평화와 기쁨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세상 전부를 가진듯한 충족감이었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들이었다.

대부분의 한국 여자들이 그렇듯 아들의 독립이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젊음을 바쳐온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는듯 했으니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갑자기 준비 안된 100세시대의 삶이 눈 앞에 펼쳐졌다. 혼자 세상에 내동댕이쳐진듯한 기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그 때 시작한 글쓰기였다. 우연만은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에 오래 잠자고 있던 꿈이었다.'글 잘쓰는 아이' 는 어린시절 내 별명이었다. 그 생각만으로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60년을 넘는 세월을 건너띤 별명이 통할리 없었다. 제대로 글 한줄 써낼수 없는 나를 발견했다. 최후의 보루였던 자존심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이 몰려 왔다. 차라리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그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글 쓰기 대신 자존심을 포기하라는 경고였다. '글 잘쓰는'아이'라는 별명을 내려 놓고 글쓰기 연습생이 되기를 자처했다. 따스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훌륭한 선생님과 같은 꿈을 키우고 있는 문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글쓰기 연습생이 되었다

뒤늦게 시작한 글쓰기가 삶의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펜을 드는 시간은 하루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 시작이 되었다. 글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며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깨끗한 모래사장을 스치다 사라지는 파도처럼 남김없이 담백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글.' 윤형두 작가가 고백한 바로 그런 글에 가까웠다. 야성적 의지를 거칠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질기고 단단한 명주실 같은 힘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글, 회상을 통해 현실을 더욱 또렷하게 비추어내고 그 속에서 자신을 관조하는 작가의 태도는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본받고 싶은 모습이었다.

충청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바다를 늘 로망처럼 품고 살아왔다. 바다는 늘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작가가 보여준 바다에 대한 사랑은 내 마음을 더욱 크게 울렸다. 그의 글에서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삶을 비추는 창이자 존재의 근원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도 바다는 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그리움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창』은 내게 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했다. 역사 앞에서 떳떳하고 싶다는 소망, 욕심으로 넘치지 않는 정직한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성공. 그것이 글 속에 담긴 메시지였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다짐한다. 내 글도 수채화처럼 차분하고 겸손하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마음을 이끌어당길 수 있기를. 파란 파도의 끝자락에 하얀 거품을 남기고 사라지듯 읽고 난 뒤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글을 쓸 수 있기를 . 늦게 시작했지만 지금 이 길이 내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되고 있음을 확신한다. 글은 이제 내게 또 하나의 바다다. 끝없이 넓고 깊으며 언제든 새롭게 다가오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