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 여행-
'종점엘 가 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특히 연말, 이맘 때면 자주 종점이 궁금해진다. 한 해 동안 못다 한 일들이 서글퍼지고 종점에서 누군가가 기다려 줄 것만 같다. "전철 종점 여행을 해볼까?" 내 푸념을 듣고 있던 친구가 즉석에서 제의를 해왔다. 마침 7호선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럼, 7호선부터, 장암역이야" 의기투합한 우리는 전철 구석에 앉아 졸며 잡담하며 종점까지 같다.
장암역이다. 의정부시였다. 장암역이 의정부 시 소속이라는 것도 모르는 청맹과니였으니 내릴 때 마음은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하러 가는 것처럼 비장해졌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까?" 당장 결정해야 했다.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었으니 가장 가까운 곳에 눈도장을 찍고 싶었다. 역사 앞에 서니 눈앞에 펼쳐진 수락산의 위용이 궁금했지만 아쉬움을 머금고 관광 안내도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을 찾았다
장암역 1번 출구에서 500m 내에 서계 박세당 고택이 있었다. 짧은 식견으로 박세당 선생님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고택'이 마음을 끌었다. 옛 것이 그리워지는 작금, 고택에 가면 고향에 온 듯한 푸근함으로 연말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루어 놓은 것 없는 헛헛한 연말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기대를 품고 고택을 찾아갔지만 사유지라 출입을 제한한다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사전에 연락을 하면 오픈해준다는 글도 있었다. 사유지를 공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건만 마음 씀이 고마웠다. 훌륭한 조상에게서 이어받은 덕이 아닌가 한다
멀리서 보이는 풍광만으로 만족하려는데 마침 문이 열리고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신다. "혹시 잠시 고택 구경을 할 수 있을까요? 사유지라 안 된다는 글은 읽었는데 "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구경할게 무에 있다고, 다음번엔 미리 연락하고 오세요" 하시며 문을 지키고 있던 진돗개의 목줄을 잡아 주셨다.
너른 마당에 들어서니 고택 못지않게 시선을 끈 건 보호수 은행나무. 400년이 넘은 나이라 한다. 서계 선생이 고택을 지으며 심으신 나무 아닐까? 잎은 떨어져 은행나무인 줄 몰랐지만 줄기는 굳건하게 서 있다. 고결한 선비 정신을 보는 듯했다.
삼천 평이 넘는 너른 대지, 이를 관리하고 사는 사람들을 보니 좁은 내 아파트도 제대로 관리 못하는 게으름이 부끄러워졌다. 고택의 종갓댁 사람은 이 모든것을 유지 관리 하는 것은 사명감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 것이다. 소나무 한그루 전지 하는데도 2인이 하루 이상 걸리는 작업이라 한다. 삼천 평 정원에는 곳곳에 주인장의 섬세한 손길이 감춰져 있다. 조금 일찍 왔더라면 아름다운 정원의 절정을 볼 수 있었을 듯하다. 여기저기 흔적으로 남은 꽃대와 알맞게 베치 된 정원 소품들이 흥미로웠다.
고택의 이모저모가 궁금하기는 하나 프라이버시는 우리가 지켜 줘야 아름다움을 오래 누릴 수 있다. 생각 없이 방문한 경솔함을 뉘우치며 다음번엔 공식절차를 거쳐 에의바르게 방문해 보아야겠다. 겉만 훑어 본 격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기꺼이 받아준 종갓집 며느님께 감사인사를 드린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번 꼭 와보고 싶은 곳으로 마음에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