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참 좋아졌다지만

by 우선열

세상 참 좋아졌다. 이맘때가 되면 너도나도 월동 준비로 몸살을 앓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젠 월동 준비라는 말이 추억이 되어 버렸다. 그립게 떠오른다.

집집마다 김장을 100 포기 이상 해서 땅속에 묻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채소들을 함께 갈무리해 두었다. 빨리 시드는 채소들은 볕이 좋은 날 햇볕에 바짝 말려야 했다. 무말랭이며 호박고지, 시래기나물 등이 여인들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곤 했다. 특히 바람 잘 통하는 곳에서 빨간 고추를 말리던 모습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

창고엔 겨울나기용 연탄이 높이 쌓여 있었다. 처음엔 축축한 물기를 품고 있던 연탄은 겨울이 깊어지면서 바짝 말라 화력도 좋아지고 쉽게 불이 붙었다. 어머니는 날씨에 따라 연탄 숨구멍을 조절하셨다. 추운 날은 느슨하게 막아 화력을 높이고 추위가 견딜 만해지면 꽉 틀어막아 연탄 타는 속도를 늦추곤 했다.

길어지는 가을밤도 어머니의 손길은 바빴다. 알전구를 넣어 구멍 난 양말을 꿰매던가 색이 고운 털실을 이용하여 뜨개질을 하셨다. 동생의 벙어리장갑과 언니의 손가락장갑이 뚝딱 만들어지기도 하고 털목도리를 비롯한 털 옷들이 어머니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뜨개 실을 푸느라 색색 공 모양의 털실 뭉치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오래된 털실 옷을 풀어 김을 쐬어 털실로 만들면 우리들은 공연히 신이 났다. 우리가 어머니를 도와야 했다. 어깨너비로 팔을 벌리고 털실을 감아 새로운 털 공을 만드는 일이었다.

볕이 좋은 날은 집집마다 문 바르는 일을 했다. 방문에 묶은 한지를 떼어내고 새 한지를 바르는 일이다. 바쁜 와중에도 어머니는 곱게 말려 둔 국화꽃이나 단풍잎을 넣어 예쁘게 무늬를 만드셨다. 어머니 손끝에서는 끝없이 마술 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겨우내 덮을 이불 홑청을 장만하는 일도 있었다. 무명천을 깨끗하게 빨아 밤새 다듬이질로 곱게 펴셨다. 박자를 맞춘 다듬이질 소리는 웬만한 오케스트라 음악소리보다 듣기 좋았다. 난타 음악의 원조 아닐까? 잘 펴진 홑청에 풀을 먹이면 바삭하던 촉감도 잊을 수 없다. 늘 새것처럼 뽀송뽀송했다.

이런 추억들이 이젠 가물가물해진다. 그나마 나는 그립지만 우리 아이들은 신화처럼 낯설게 들릴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월동 준비는 카드 한 장이면 그만이다. 따뜻한 옷을 미리 장만할 필요도 없다 필요할 때 한 발자국만 내딛이면 원하는 옷들이 지천이다. 나갈 필요도 없이 방 안에서 검색하고 주문을 넣기도 한다. 총알 배송, 원하는 날짜에 손안에 들어온다.

따스한 음식도 주문하면 식기 전에 먹을 수 있고 난방도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방을 따스하게 덥힐 수 있는데 단추 하나 누르면 끝나는 일이다. 요즘엔 단추조차 손수 누르지 않는다. 말만 하면 Ai 이 모든 일을 맡아서 해준다.

카드 한 장이면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데 이 카드가 요물이다. 색마다 한도가 다르다. 한도에 따라 월동 준비가 달라진다. 하룻밤에 몇백만 원을 지불하는 초호화 호텔도 있고 산 1번지 쪽방에서는 무방비 상태의 겨울바람이 몰려든다. 산해진미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기도 하고 사흘 굶어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비싼 밍크 털로 몸을 감쌀 수 있는 카드도 있고 양말 한 켤레도 지불 정지를 당할 수도 있다. 카드의 마법이다. 성능 좋은 카드를 마련하는 일은 월동준비는 물론 생활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플라스틱 카드 한 장에 인생이 담기고 추억이 만들어진다. 세상 좋아졌지만 카드 한 장으로 버티는 세월이 행복하지는 않다. 불편한 시절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