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시, 아침 채비를 마치고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다.
2025년 12월 31일 다섯 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단한 정리를 마치고 책상에 앉으니 미처 다섯시가 되지 못했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아직 일상이 시작되기 전, 이 시간은 아무런 방해가 없다.
일고여덟시쯤 일상이 시작되면 인간사 얽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어울려서 살게 마련이니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조금 이른 이 시간이 내겐 덤이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된다.
밤의 적막과는 다른 새벽의 고요가 한몫한다
밤의 적막에는 못다 한 하루분의 미련과 아쉬움이 섞이지만
또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은 백지와 같아 긴장과 설렘이 있다
정화수를 떠놓던 어머니의 심정이 이 같지 않을까?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쓴다.
첫 글은 대부분 블로그 질문이다
From 블로그 씨라는 질문은 매일 자정에 발표된다
내가 이 질문을 확인하는 시간은 다섯 시가 되고 그때부터 질문에 답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오늘처럼 영상을 함께하라는 메시지가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
내가 쓸 수 있을 만큼의 글을 쓸 뿐이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 때와는 다른 묘미가 있다
내가 만들 요리의 재료를 구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재료로 신선한 음식을 만드는 것 같은 새로움이 있다
. 요즘 인기있는 TV프로 '냉장고를 부탁해'같은 맥락이다
내가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서른 개의 노을'이라는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작가가 되려면 한 가지 주제로 서른 개의 작품을 써보라는 말을 듣고 작가가 '서른 개의 노을' 작품을 써 내려가는 과정을 쓴 글이었다.
화자와 시점과 주인공을 바꿔가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쓸 수 있다는 팁도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얼 어떻게 써 내려갈지 모르는 초보 글쓰기인 내게 길잡이가 되어 줄 듯했다
적어도 무얼 쓸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의기양양하게 시작했지만 곧 얼마나 무모한 시작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한 가지 주제로 한 작품을 쓰기도 모자라는 실력이었다.
그야말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시도였지만
글쓰기의 길이 그리 만만치 않은 역경임을 깨우칠 수는 있었다
잠시 당황스러웠고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포기도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꿈이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60년 이상 외면했던 일이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 나이에"가 발목을 잡고
"문학소녀 한 번쯤 꿈꿔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니?" 하는 친구들의 말이 비수로 꽂혔다
그 암울함 속에서도 쓰고 싶다는 열망이 꿈틀거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내 정체성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글 잘 쓰는 아이'라는 별명을 내려놓아야 했다.
나는 글쓰기 연습생이 되었다.
이제 막 등단한 새내기이니 아직 갈 길은 멀게만 보이지만
언젠가는 한 가지 주제로 서른 개의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실력을 기르려는 내 나름 작가의 기준이 생겼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로 글을 써야 하는 블로그 질문은 시선을 넓히고 생각을 확장 시켜 준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생강차를 마시거나 커피를 마시지만 새벽 다섯 시엔
어김없이 컴퓨터를 켜고 블로그 씨 질문에 대답하는 글을 쓰고 있다
2025년에도 1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번도 뺀 적이 없다
지난 상하이 여행 중 빠듯한 일정인데 새벽 다섯 시에 부산을 떨던 나 때문에 피곤했던 룸메에게 미안하기는 했다
나의 새벽 다섯 시 기상은 한 가지 주제로 서른 개의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