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깨니 챔피언이 되었다'더니 어느 날 문득 베란다 구석에서 히아신스 싹이 두개나 발견되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인류 역사상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노력하고 기대했던 결과였다. 신기하다기보다는 챔피언이 되는 인고의 시간이 지난 후 얻을 수 있었던 결과물이기도 하다. 어렵게 된 챔피언도 막상 오르고 나면 자다 깨어 보니 이루어진 것처럼 느닷없어 보인다는데 베란다 구석에서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히아신스에 싹이 났으니 컬롬 부스의 신대륙 발견쯤은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할렐루야'하며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환희의 시간이 지나자 곧 난감해졌다. 꽃이 예쁜 줄은 알지만 내 손으로 꽃 피워 본 적은 없는 청맹과니이다. 꽃을 피우기는커녕 꽃 핀 식물을 사다 놓고 나름 물도 주고 애지중지 키우건만 꽃들은 얼마 안 가 내 손에서 시름 시름 시들어 버리고 마는 처지이다. 시든 꽃이 안타까워 차마 버리지 못하고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 놓는 순정 파이기는 하다. 시거든 떫지나 말아야 하는데 잘 보살피지는 못하면서 마음만 애틋하다. 하긴 이런 내 마음을 우리집 베란다 꽃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년 여름 8년 키운 호야가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호야가 왜 8년 만에 꽃을 피웠는지는 모르겠다. 주인이 무심하여 꽃 피는 식물인 줄도 모르고 키운 까닭일 수도 있겠다. 호야도 주인 닮아 꽃 핀다는 걸 잊고 있었나 보다. 늦게나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스스로 꽃을 피울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꽃이 핀 화분을 사들이지 않고 내가 키워 꽃을 본 것은 호야가 처음이다.
그것이 징조였을까? 이번엔 히아신스 구근에서 홀로 싹이 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물 한 모금 준 적이 없건만 그 긴 날을 무엇으로 어떻게 버텨 냈을까? 주인에 대한 서운함이 와신상담,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을까? 그리 모질지 못한 내 성격을 알고 있을 터이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칠칠치 못한 주인이 못 미더워 혼자 살아 낼 궁리를 한 것일 수 있다
어쨌거나 뾰죽이 돋은 새싹이 예쁘기는 하다. 똑같은 구근 같건만 싹 난 모습은 각자 아주 다르다. 한 개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삼각형이고 다른 한 개는 젖니 솟는 아기 이빨처럼 송글송글하다. 봄에 솟는 새싹처럼 연하고 야리한 모습이 아니라 검푸른 빛을 띠고 단단해 보인다. 엄동 설한에 맞서야 하는 처지를 알고 있나 보다 싶지만 나는 나대로 걱정이 많다. 이 가냘픈 것을 어떻게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베란다에 두 자니 영하의 날씨가 걱정이고 방안에 두 자니 광합성이 걱정이다. 짚신 장수 아들과 우산장수 아들을 둔 어미 꼴이다. 하늘만 올려다보고 깊은 한숨을 쉰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녀석들 아직은 건강하게 크고 있다. 심각형 봉우리가 1Cm쯤으로 자랐고 우두두 돋고 있는 여러 개의 싹도 제 자리를 잡은 듯이 보인다. 이대로 봄이 왔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겨울 초입,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보인다.
"과보호는 옳지 않아, 어려움을 이겨내고 커야 건강해지는 거야." 하다가 "얼어 죽으면 그만이잖아, 저 조그만 것이 어떻게 모진 겨울 추위를 견뎌 " 천사와 악마가 내 안에서 싸우고 있다. 아는 것이 힘이다. 히아신스 키우기를 검색했다. 아뿔싸, 지금이 싹트는 시기가 아니라 뿌리를 심는 시기라 한다. 철모르는 우리 집 히아신스가 제멋대로 싹을 올린 것이다 싹이 난 후에는 15도에서 20도 사이의 기온이 좋다 하는데 베란다는 아무래도 추울 듯하다. 얼어 죽고 말 것 같다. 낮에 베란다에 내어 놓더라도 밤에는 방안에 들여야겠다. 일찍 태어난 아기는 인큐베이터에서 보호하듯이 철모르는 히아신스도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할 듯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신대륙도 그냥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머릿속에서 미리 터진 팡파르의 값을 치러야 히아신스도 살릴 수 있다. 죽은 줄 알았던 뿌리에서 새싹이 돋는 기적의 값은 어떻게 치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