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코끼리의 걸음마'를 들으며

by 우선열

입춘이 지났다. 해가 노루 꼬리만큼 길어졌다. 얼마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이미 패잔병의 몸짓을 닮아 처절하고 황망할 뿐이다. 느슨해진 겨울의 틈을 비집고 봄이 들어서고 있다. '언제쯤 복수 꽃이 피려나' 기다리는 마음은 이미 봄이다.

이맘때면 나는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를 듣는다.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도 않다. 보이지 않던 야생화가 어느 날 문득 눈에 띈 것과 같다고 할까? 어느새 입속에서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를 흥얼거리고 있다

커다란 몸집으로 뒤뚱뒤뚱 걷는 코끼리의 서툰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지만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외줄 타는 이의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이내 중심을 잡는다. 조마조마 지켜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세상을 얼어붙게 하는 동장군의 위세를 물리치는 건 아주 작을 햇살 한 줌,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이다 .겨울을 버텨 내는 건 의연한 나목이지만 봄을 부르는 건 연약한 새싹이다. 커다란 몸통을 지탱하며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 코끼리를 닮았다.

100 세 시대의 노후는 마치 거대한 쓰나미 같이 다가왔다. 미처 준비도 못 했는데 30년 이상의 세월이 덤으로 얹혔다. 준비된 사람이라도 예상 기간의 곱절은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다. 골고루 인생 전반에 걸쳐 나누어져야 할 세월이라는 짐을 한꺼번에 짊어져야 한다. 준비된 자에게는 로또 같은 기간일 수도 있겠으니 장수는 분명 축복이 되어야 하겠지만 준비되지 않는 노후는 재앙이라는 현실도 함께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긴 겨울을 예감했다. 동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될 수도 있었다. 그곳에 나목으로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나목은 모든 걸 버리고 추위를 맨몸으로 견딘다. 남은 까치밥을 내어주고 까치집을 지키며 봄이 온다는 것을 믿고 있다. 내게도 나눌 것이 있을까?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이제 와서라는 긴 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제부터는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처럼 위태로울 수도 있겠다. 힘들겠지만 걸어 보기로 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가보고 싶다. 100 세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지고 뒤뚱뒤뚱 걷고 있다. 금방이라도 넘어질듯했으나 아직 넘어지지 않았다.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

겨울이 제아무리 깊어도 봄은 오고야 만다. 아기 코끼리처럼 서툰 걸음으로 입춘을 보냈다. 100세 시대라는 뜻하지 않은 덤에도 글쓰기라는 틈새가 생겼다. 복수초 한송이 피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