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을 가능성

by 우선열

'네가 12시에 온다고 하면 나는 한 시간 전부터 행복할 거야' 어린 왕자의 이 말이 택배 상자가 도착하는 시간일 때도 분명 있었다. 홈쇼핑 사회자가 "이제 마감 5분 전입니다. 한꺼번에 주문이 밀리고 있습니다. 이젠 5분 더 버티지 못할 거 같네요. 지금 수화기 드신 분까지 주문 가능합니다. 지금!"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수화기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마음은 늘 급했다. 다급한 사회자의 말처럼 당장 주문한 물건이 올 것만 같았다. 실망도 하고 뜯지 않는 상자가 베란다 구석에 쌓이기도 했지만 호기심 많고 충동적이던 그 시절을 탓하고 싶지만은 않다. 팽팽한 낚싯줄을 당기는 맛이 이러할까? 제법 그럴듯한 상상도 하던 시절이다.

이젠 뭔가를 사는 일에 둔감해졌다. 마지못해 먹을 걸 사거나 소모되는 일용품을 사들이는 정도이다. 즐겁기만 하던 선물 받는 일도 부담스럽다.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에 먼저 신경이 쓰인다.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때문이다. '언젠간 쓸모가 있을 거야' 하며 다 쓰고 난 물건의 빈 통도 모아두고 흔한 비닐봉지마저도 쌓아둔다. '비닐은 썩지도 않는데 그냥 버리면 안 돼'가 이유이다.

환절기가 되면 몸살을 앓는 게 옷 정리이다. 3~ 40년 전 옷부터 쌓여 있다. 번번이

"이번엔 싹 정리해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목 늘어진 티셔츠는 편하다는 이유로, 삼 년 동안 한 번도 안 입은 정장은 언젠가 필요할 일이 있을 거 같아서, 낡은 옷은 선물 받은 거라, 저마다 핑계가 있어 다시 곱게 접어 모셔둔다. 버리는 괴로움 대신 사는 즐거움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젠 정리해야 할 때"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호기심보다는 미련을 떨치기 어려웠다. 사는 걸 줄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중독 같던 사재기 증상이었지만 금단 증상은 없었다. 정리하는 짐을 덜 수 있다는 안도감이 한몫했다. 한 가지 예외는 있다. 신문에서 신간 서적 소개를 보면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들썩인다. 온라인에 익숙지 못하건 차라리 다행이다. 즉석에서 주문을 넣지 못하고 메모를 한다. 메모지를 들고 서점엘 가지만 서점에 가면 이성을 잃는다. 적어 온 메모는 까맣게 잊고 신간과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멈추고 만다.

쌓아 놓은 책 앞에서 흐뭇한 마음과는 달리 침침해진 눈은 책 읽기를 거부한다. '언젠간 읽고 말 거야 '다부진 각오를 하지만 현실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더욱이 등단 이후로는 각종 문예월간지와 등단 작가들의 신작들을 심심치 않게 받을 수 있다. '언젠간 읽고 말 거야' 하는 책들이 쌓여간다.

"더 늦기 전에 책도 정리를 해야겠어요" 하는 문우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한 권 한 권 사모은 내 책도 소중하고 정성껏 보내준 작가들의 책은 더 소중하다. 읽지 않는 책부터 정리해야 한다지만 나는 읽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읽고 있는 것뿐이다.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한다.

정리되지 못한 책장 앞에 설 때마다 부담스러웠다. '서점엘 가지 말자''신문 신간 서적 코너는 읽지 않아야 해' 나름 방법을 모색 중인데 신문에서 "책 읽을 가능성을 사랑한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무릎을 탁 쳤다.

내 책들은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 읽을 가능성이 있는 책이었다. 읽었다는 말보다 반가웠다. 책 읽을 가능성을 사랑하기로 했다. 월초에 오는 월간지를 기다리며 우체통을 기웃거리는그 시간에 나는 어린 왕자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