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은 특별했다. '시의 공간'을 찾아 나섰다. 2026년 2 월 21일 자 중앙일보 STORY, '조성익의 인생 공간' 상암동 노을공원 '새로운 지층' 기사의 제목이 <건물인 듯, 공공 미술인 듯··· 질문 끌어내는 '시의 공간'> 이었다.
'시의 공간'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 기사에서 조성익 건축가는 '시의 건물'로 제주도의 풍 뮤지엄과 고대 로마의 에르콜라노를 들었다. 세 도시를 직접 가보고 싶지만 현실 환경이 여의치 않으니 당장 가 볼 수 있는 노을 공간 '새로운 지층'을 찾아 나섰다
조성익 건축가는 김효영 건축가가 설계한 '새로운 지층'을 건물과 공공 미술의 중간쯤 있는 구조 불같다고 소개한다. 벽과 지붕은 있지만 창문과 문이 없어서 어디부터 내부인지 어디부터 외부인지 분명치 않다. 무엇에 쓰라고 만든 건물인지도 알려주지 않는 이 건물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되묻는다.
이 건물을 본 그의 어머니가 "이 건물은 시구나" 하셨다. 어머니는 대학에서 시와 문학을 가르치다 은퇴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 그는 산문의 건축과 시의 건축을 구분할 수 있었다. 우리가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주택 사무실 카페 등은 완성된 문장으로 시작하는 산문의 공간이고 시의 공간은 기능을 내세우기보다 감각을 일깨워 주고 답을 알려주기보다 질문을 유발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내가 건축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예술성과 실용성을 같이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실용성에 집착하면 생활이 건조해지고 예술성에 치우치다 보면 불편해진다. 경계를 잘 지켜야 좋은 건물이라는 내 나름의 식견이다.
나는 산문의 건축물에 치중하는 편인 것 같지만 시 건물에 대한 호기심도 억누를 수 없었다. 노을 공원을 찾아 나섰다
다섯 개의 공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월드컵 공원에서 노을 공원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월드컵 경기장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난지천에서 하차 2.7K를 걸어야 한다. 주말에만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8777번 버스는 노을 공원 입구까지 갈 수 있다.
노을공원에는 맹꽁이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니 가는 길이 좀 멀더라도 그리 힘들지는 않다. 오히려 '새로운 지층' 건물을 찾는 게 어려웠다. 조성익 건축가는 맹꽁이 차를 타고 내렸다는데 우리가 탄 차의 기사는 '새로운 지층 건물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정상까지 올라가 더듬어 내려오며 찾아보기로 했다. 덕분에 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고 물오르는 봄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도 있었다. 전화위복이라 여긴다,
정상에서 걸어 내려오면서도 그럴듯한 건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하며 내려오려는데 젊은이들이 웨딩 명소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젊고 예쁜 젊은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데 주변 풍광이 일품이었다. 조금씩 발을 딛여 놓다가 '
"심봤다!"
한눈에도 '새로운 지층' 임을 알 수 있었다. 웨딩촬영 장소 뒤편이니 언덕에 가려 볼 수 없었나 보다. 단 숨에 뛰어 내려갔다. 지붕과 기둥은 있으나 벽과 창이 없다. 아니다 하늘에는 구멍이 뚫리고 열린 틈으로 나무가 길게 자란다.
나무 들 옆에는 작은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조금 더 봄이 깊어졌을 때 오면 온갖 꽃들의 재롱을 볼 수 있을 듯하다 .칸이 나누어져 있는 것 같지만 경계는 없다. 시인 어머니가 되어 벽을 쓰다듬어 본다. 흙의 감촉이 싫지 않다. 나보다 먼저 바람이 스쳐 지났을 것이다. 바람을 만진 기분이 이러할까?
내 상식으로는 '새로운 지층'은 건물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 잠시 쉬어가기 좋다. 하긴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우리 선조 들을 생각하면 현대판 정자라 할 수 있을까? 그냥 '시의 공간'이라는 말이 딱 맞는다. 누구라서 이보다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을까? 시가 사는 공간이 맞다. "다음에 꼭 다시 오리라" 이게 내가 쓸 수 있는 단 한 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