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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sun Cho Sep 18. 2020

엄마됨.은 무엇일까?

-소설 '다섯째 아이'와 영화 '케빈에 대하여'

오랜만에 만난 변호사님이 나에게 둘째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저는 임신이라는 게 많이 힘든 경험이었어요. 하나로 괜찮은 것 같아요."라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말을 뱉고 나서 아차 하고 짧은 순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그런 말을 해도 될까.

아니, 그보다 그런 말이 이 사회에서 용인되는 말일까.

 

49개월째 육아와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하루하루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주변 분들에게 빌려가며 살아가는 나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강요하는 엄마상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다.


일단 고용변호사로 일하면서 겪게 된 임신기간 동안

임신이라는 벅찬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다가오는 출산예정일과는 무관하게 밀려가는 일감을 보면서 아득한 불안감에 시달렸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100일도 안되어 회사로 복귀한 후 일과 육아 사이에서 끝없이 좌절하고 분노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이벤트를 겪으면서 읽게 된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와

린 램지 감독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라는 생각을 하고

몇 달간 글을 완성하지 못하다가 이제 용기를 내서 글을 완성한다.


1.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작가 소개]

도리스 레싱은 1919년 이란에서 태어난 영국의 작가다.

첫 소설인 '풀잎은 노래한다'는 1950년 런던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2007년 역대 최고령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는 두 차례 결혼하고 두 차례 이혼했으며,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소설 소개]

'다섯째 아이'는 국내에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도레스 레싱의 작품으로, 출간과 함께 바로'고전'으로 남을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녀는 이 작품을 발표한후 뉴욕 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섯째 아이'를 착안하게 된 두 편의 글을 소개했다.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전해져 영향을 미친다는 고고학자의 글과, 정상적인 세 아이를 낳은 뒤 태어난 사악한 네번째 딸 때문에 행복한 가정이 파괴되었다고 하소연하는 한 어머니의 사연을 담은 잡지의 글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이 두 편의 글을 자연스럽게 녹여'다섯째 아이'의 큰 틀을 잡았다.

(출처: Yes24)


소설 속 남녀주인공은 당시의 시대상에 비해서 고지식한 성의식과 가족관념을 가진 부부이다.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가정에서 항상 아이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대가족을 꾸리기로 의기투합하고 계획적으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다.


이 과정에서 다섯째 아이 벤은 임신 당시부터 남달랐다.

뱃속에서부터 엄마를 고꾸라트릴 정도의 강한 발길질로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이며 자란 아이는

태어나서도 괴물과 같은 체격조건으로 자라나고

그 과정에서 신체의 성장과 더불어 응당 갖추어야 할 정서적인 성장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괴물아이'.


엄마인 헤리엇은 그럼에도 불과하고 엄마는 마땅히 아이를 사랑하고 스스로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 다섯째 아이 '벤'을 집에서 기른다. 그 과정에서 벤은 형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하고, 집에 있는 동물들은 다 살해한다.


매년 온 가족이 모여서 축제분위기였던 헤리엇과 데이비드의 목가적인 집은 벤이 무서워 아무도 오지 않는 황량한 집이 되었고 오직 벤을 외부로부터 격리하는 하나의 감옥이 된다.


처음에는 가정관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했던 부부는 벤이 자랄 수록 벤의 육아 문제로 심하게 다투게 되고

아버지인 데이비드는 나머지 4명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벤을 소아정신병동으로 보내고

이 가정에는 잠시의 평화가 찾아온다.

엄마인 헤리엇은 여전히 자책감과 엄마됨에 대한 강박을 버리지 못해 소아정신병동에 입원한 벤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여기서부터 부부의 신뢰와 애정은 완전히 깨지게 되고,

헤리엇과 데이빗 사이의 벤을 제외한 4명의 형제들마저 친척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 소설은 결국 성장한 벤이 갱단에 가입해서 악의 소굴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2. 영화 '캐빈에 대하여'


다섯째 아이가 벤의 캐릭터에 대한 설득보다는 이러한 아이를 키워내는 엄마의 측면에서 헤리엇의 주된 심리변화를 그려냈다면

영화 '캐빈에 관하여'는 괴물로 자라게 된 한 아이의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감독 소개]

린 램지는 1995년 영국 국립영화TV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작품 '작은 죽음'으로 칸느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다음 작품인 '시간 보내기'로 끌레르몽 페랑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개스맨'은 두번째로 1998년 칸느영화제 단편영화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하였다. '쥐잡이'는 램지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으로, 그녀와 단편영화 작업을 같이 해온, 영화학교 동료들과 작업한 것이다.

(출처: 씨네21)


[원작자 소개]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195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은 마거릿 앤 슈라이버였으나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아 15세 때 스스로 보다 중성적인 분위기의 라이오넬로 이름을 바꾸었다.

버나드 컬리지와 컬럼비아 대학에서 예술학을 공부했으며 1986년 'The Female of the Species'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중 '케빈에 대하여'는 2005년 오렌지 상 수상작이자 2006년 BCA 크라임 스릴러 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

모성 이야기와 심리 스릴러가 절묘하게 혼합된 이 작품은 ‘소시오패스 아들을 둔 어머니의 독백’이라는 충격적이고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의 중심에 섰고, 입소문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2010년 출간된 'So Much For That'으로 내셔널 북 어워드 최종 후보에 오름과 동시에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스타 작가로 발돋움했다. 저널리스트로도 활동 중인 그녀는 <월스트리트 저널>, <파이낸셜 타임스>, <뉴욕 타임스>, <가디언> 등에 사회 문제와 정부의 역할 등을 날카롭게 꼬집는 글을 쓰기도 하고 영국의 빈민 구호 단체인 옥스팜 활동에도 참여하는 등 지식인으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때 나이로비와 방콕, 벨파스트 등에서 살았으나 현재는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살고 있다

(출처:Yes24)


[영화 이야기]

케빈에 관하여의 영어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우리는 캐빈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제목이다.


일단 참사는 일어났고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케빈은 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영화는 주인공 케빈이 강당에 모여있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활로 쏘아죽인 대참극이 벌어진 이후와

이전의 케빈의 성장과정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자유로운 여행가인 에바는 얼결에 임신을 하게 되면서 여행가로서의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임신 기간 내내 에바는 자유로운 삶을 그리워했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아이를 낳은 직후부터 아이가 내 커리어를 파괴했다,는 생각으로 아이를 대하고

엄마의 이 은근한 원망은 제대로 된 상호소통의 부족을 가져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케빈 역시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기보다는

부모, 특히 엄마인 에바에 대한 애증을 수년간 마음에 쌓아간다.


에바는 네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가 훨씬 행복했다는 말을 케빈에게 대놓고 하기도 하고

전원의 대형주택으로 이사간 후에는

아이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방을 만든다.


주인공인 에바는 자신의 인생에서 준비되지 않은 돌발상황으로 찾아온 첫째인 케빈에 대해서는

방어적인 태도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아이를 대하지만

가정을 이루고 어느 정도 변화된 삶에 익숙해진 후 찾아온 둘째 딸아이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엄마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한다.


엄마아빠의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방법을 배운 동생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마음은 어땠을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 편하게 보기 힘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장면이 있다면

주인공 케빈이 아팠을때, 엄마가 로빈훗을 읽어주면서 케빈을 보살피고

매사에 반항적이었던 케빈이 엄마에게 몸을 기대는 장면이었다.

이후의 참혹한 결과와 상반되게 유일하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엄마와의 기억.


에바와 남편은 케빈이 사춘기에 다다른 시점에서 양육방식에 대해서 이견을 보이다

이혼을 하기로 합의하게 되고,

이 대화를 들은 케빈은 자신의 가정이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자신이 먼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살해한다.

엄마인 에바만 빼고.


케빈은 아빠와 여동생부터 활로 쏴죽인 후에

학교에 가서 체육관 문을 걸어잠그고 급우들을 하나씩 활로 쏴서 살해하고

순순히 체포된다.

로빈훗을 좋아하는 케빈에게 아빠가 사준 화살

이후 에바는 하나의 문제거리, 피하고 싶은 골치덩어리였던 케빈은 자신의 인생에서 퇴장했지만

케빈이 만들어 놓은 감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웃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지옥에 가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집에 피범벅과 같은 붉은 페인트 세례를 당하기도 한다.


항상 케빈을 외면하던 에바는 이 사건 이후 매주 아들을 보러 형무소에 가게 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자신의 삶, 케빈과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 말미에 성년이 되어 이감되게 된 케빈에게 에바는 용기를 내어 왜 그랬는지를 묻게 되는데

케빈은 "예전에는 이유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라고 대답한다.


케빈이 왜 이랬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케빈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했다.


인간은 애석하게도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태어난 직후부터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생존을 위한 자립이 가능할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낳아준 가족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필요한 생존에 대한 도움 뿐 아니라 정서적 교감까지도 하게 된다.


하지만 케빈은 엄마로부터 기본적으로 애정이 아닌 원망을 받았고

엄마의 눈에서 '케빈이 없었을 때의 행복했던 자신'에 대한 향수를 읽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행복해하는 엄마의 방을 파괴하고 싶었고

엄마가 원하는 기본적인 발달상황을 거부했을 것이다.

케빈의 어린시절, 공 굴리기는 할 줄 알지만 하면 엄마가 기뻐하므로 안 한다

케빈은 영화 말미에 엄마를 빼고 모두를 살해한 이유는 예전에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해석은 많이 갈리지만

나는 케빈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엄마에 대한 복수심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해서 엄마인 에바가 자신에 대해서 평생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에바는 케빈을 키우는 내내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았지만

케빈의 사고 이후에는 케빈이 이와 같이 자라게 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살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아이를 돌아보게 된다.


3. 우리 역시 모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완벽한 형태의 대가족을 원했던 주인공이

자신의 기대상과 다른, 통제 불가능한 괴물 아이를 낳게 되었음에도

이를 이른바 '모성'이라는 개념과 전통적인 가정에서 요구되는 가정의 형태에 억지로 구겨넣게 되는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서의 악몽과 같은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케빈에 대하여는 어쩌면 다른 아이와 딱히 다를 것이 없는 부모에 대한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가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원망을 받으면서 자라는 경우에

어떠한 식으로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는 괴물로 '바뀌어 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혹자는 케빈이 태어날 때부터 싸이코패스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와 같이 판단할 근거는 영화에서 별로 나오지 않는다)


다섯째 아이에서는 '만약 정신병원에 감금된 벤을 구출해내서 가정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케빈에 대해서에서는 '케빈이 엄마의 애정을 구할 때 한 번이라도 더 돌아봤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둘다 결말이 달라졌겠지.


우리 사회는 출산한 엄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기대상이 있다.

그 기준을 충실하게 따르려고 노력하는 여성과

아예 이를 대놓고 파괴하는 여성,

그리고 기준과 현실 사이에서 계속해서 고민하는 여성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주변에서 모유수유를 하지 않는다고 죄책감에 젖는 선후배,

아이를 100일만에 집에 두고 직장에 나왔다고 계속해서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동료를 쉽게 보게 된다.

항상 자신은 나쁜 엄마라고, 아기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임신기간을 합해 고작 60개월여를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온 내가

감히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데 몇 달을 망설였지만

한 번은 모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나는 5년 넘는 시간을 하나의 자격증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고 내달렸던 사람이다.

그리고 이 직업은 다른 직업에 비해서 시간이 투자되는 만큼의 작업결과가 나오는 일이다.

하나의 사건을 진행하면서 그 어떤 일도 예전의 사건과 같지 않고

의뢰인이 원하는 방향도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1. 가용가능한 최대한의 시간을 확보한다.

2. 그 시간을 일에 쓴다.

두 가지의 조건이 input으로 들어가야 어느 정도의 output이 나오는 작업이다.


그런데 여기에 '육아'라는 하나의 과업이 추가된다.

그런데 아이는 홀로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이 아이의 양육에 투입된다.

결국 1. 가용가능한 최대한의 시간이 아이에게 쓰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output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변호사들이 출산을 기점으로 퇴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송무변호사들이 출산을 기점으로 퇴사 혹은 장기휴직-사내변호사 혹은 공공기관 취업으로

노선을 바꾸거나 개업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시간이라는 한정재화를 일과 육아에 나누어 쓰게 되다보면

송무라는 시간집약적인 업무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


'모성'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모성이라는 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인간의 본능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경우를 봤을 때는 임신기간 동안 딱히 행복하거나 기대에 부풀지도 않았고

혹시나 내가 업무 스트레스로 아이를 건강하게 낳지 못하려나 싶어 걱정만 잔뜩 했던 것 같다.

출산을 하고 나서는

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어떻게 쪼개야 출산 전과 같은 퀄리티의 아웃풋을 낼 수 있나를 고민했던 것 같고.


하지만 내 아이는 나의 전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선택권도 없이 나를 부모로 맞이하게 되었고

이 아이의 보호자는 나와 남편밖에 없다,는 마음도 '모성'이라면

나의 모성은 출산 이후에 서서히 만들어진 것 같다.

시험공부를 할 때 잔뜩 사두었던 문구류는 아이와의 놀잇감으로 바뀌었다


개업을 한 지금은 고용변호사로 일할 때보다 조금은 시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나는 한가하게 느릿느릿 아침을 먹는 아이를 채근하고

9시반에는 회사에 가서 의뢰인들을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제공하다

6-7시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돌본다.


나의 사건도, 나의 아이도 나 하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이 2개의 공들 중 하나라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저글링을 할 것이다.


그 사이에 사회가 만들어진 엄마상과는 꽤 다른, 아니 그 기준에 한참 못미치는

집도 엉망이고 가끔은 레토르트 식품으로 아이 식사를 떼워버리고

내 피곤에 못이겨서 타요를 틀어주고 기절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이게 될 것 같다.


결국에는 헤리엇과 에바의 사이에서 적정선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허덕허덕 일과 아이라는 두 개의 수레를 끌어나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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