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야할까? 내일 갈까? 오늘은 놀고 모레 두 시간 들으면 안 될까?
시간이 없다는 말은 반쯤만 핑계였다. 수련을 앞둔 시간마다 깊이 갈등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베스파를 놓고 온 날은 교통편이 모호해서, 미팅이 있는 날은 시간이 애매해서 그랬다. 하지만 내적 갈등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었다. 너무 아팠다. 요가를 수련하는 그 순간의 고통이 낯설고 싫었다. 일주일에 3시간의 수련. 일단은 그렇게만 약속하고 시작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자세부터 고통스러웠다. 아래 허리가 심하게 당겼다. 내 몸은 가까스로 녹는 것처럼, 쩍쩍 갈라지듯 움직였다. 꽁꽁 언 땅 같았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올 때마다 그 때의 고통이 생각났다. 뻐근하고 날카로웠던 그 통증을 알면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 주변에서 능숙하게 자세를 이어가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조바심이 올라왔다. 시작할 땐 그렇게 괴롭다가 나중엔 5월처럼 부드러워졌지만… 견딘 후의 부드러움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고통은 늘 ‘지금’이었다. 고통이 다른 모든 감정과 의지를 지배했다.
어떤 수업에선 군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복창할 것 같은 기세였다. 어떤 자세는 거의 기합 같았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복근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어깨는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티셔츠도 바지도 땀으로 흥건했다. 요가가 정적인 운동이라고 누가 그랬지? 수련을 마친 후의 매트 위에는 딱 내 몸 같은 자국이 남았다. 누웠던 모양 그대로 땀으로 젖어있었다. 검도관이나 유도장에서도 그렇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요가는 냉정한 수련이었다.
요가를 막 시작했던 당시의 나는 [GQ]에서 피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것에 익숙해진 때였다. 그 회사에서 8년을 지내는 동안은 월요병이란 말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존경하는 상사와 선배가 한 팀에 있었다. 유능하고 마음까지 통하는 후배도 옆에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직업이었다. 칼럼을 쓰거나 화보를 만드는 일,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일은 매달 달랐고 매번 새로웠다. 자주 사랑받았다. 지치는 날이 없지 않았지만, 일상의 거의 모든 시간과 마음을 일에 쏟았다.
몇 해 전 이사한 집도 사랑스러웠다. 쉬는 날 오후 4시 즈음부터는 거실에 앉거나 누워서 해가 지는 걸 지켜봤다. 봄, 여름, 가을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쏟아져 들어오던 빛이 노랑, 주황, 빨강을 거쳐 마침내 검정으로 바라보는 걸 보는 시간이야말로 좋은 여유였다. 귀하게 즐기는 시간이었다. 짙은 감상이나 멜랑콜리와는 멀고 멀었던 감정. 평온하고 부드럽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집에서 보내려고 발걸음을 재촉한 적도 없지 않았다. 일도, 여가도, 사랑도 꼭 그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으로는 설명 못 할 일들이 동시에 늘어가고 있었다. 억지로 사는 것 같았다. 어떤 날 아침엔 누가 내 코를 꿰서 끌고 가는 듯 깼다. 끌려가면서도 그런 줄 몰랐다. 그게 행복이라고 믿으면서 기꺼이 갔으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일도 아니었다. 나는 어쨌든 앞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멈춰서 둘러볼 마음도 없었다. 자잘하고 불길한 징후 같은 건 무시하고 걸었다. 그래도 끄떡 없을 것 같아서였다. 불안이 가까스로 희미했을 때, 나는 오만했다.
요가원에서 느꼈던 아픔의 정체도 실은 오만이었을 것이다. 그때 가장 무서운 아사나는 견상자세였다. ‘아사나’는 산스크리트 어로 ‘앉다’라는 뜻. 요가에선 동작, 움직임, 자세를 뜻하는 말이다. 견상자세는 산스크리트어로 ‘아도무카스바사나’, 영어로는 ‘Downward-Facing Dog’이라고 한다. 얼굴은 아래로, 엉덩이는 하늘로 높이 들어올리면서 상체를 쭉 펴는 자세. 지면과 닿아있는 부분은 두 손과 발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호되게 기합 받는 것처럼 보인다. 5분 남짓의 웜업을 거치고 나면 거의 곧바로 견상자세로 이어졌다. 흐름의 시작, 고통의 자각이었다. 입에선 탄식이 나오는데 곧 다물어야 했다. 요가 수련에선 코로만 호흡하니까.
납득이 잘 안 됐다. 아파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그 와중에 살짝 옆을 보면, 세상에 그런 평화가 없었다. 모두들 유연하고 단정한 자세였다. 고통의 흔적도 안 느껴졌다. 호흡 소리는 바닷가에서 듣는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내 방에서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크고 규칙적이었다. 나만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았다. 내 뒷꿈치는 바닥에 닿지도 않았다. 무릎도 허리도 못 폈다. 스스로 비교하면서 괴로웠다. 자세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버티는 시간보단 움직이는 시간이 나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온 몸의 긴장감을 느껴봅니다. 그저 가만히 놓아주는 연습. 자신의 호흡에 의식을 집중합니다.”
선생님은 자세와 자세 사이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무슨 말이지? 모조리 수수께끼 같았다. 아도무카스바사나, 비라바드라사나, 트리코나사나 같은 이름은 듣기에도 쓰기에도 어려웠다. 무슨 밀교의 주문 같았다. 그런 음절들이 가로수처럼 스쳐갔다. 그마저도 곧 안 들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따라 자세를 취하고, 옆에서 수련중인 누군가의 아사나를 보면서 바쁘게, 가까스로 따라가던 시간이었다. 몸은 아프고 정신은 없었다.
“오늘의 자세가 다를 수 있고, 내일의 자세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오늘 되던 자세가 내일은 안 될 수도 있고, 어제 됐던 자세가 오늘은 안 될 수도 있어요.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서두르지 않고 오늘의 나를 받아들여줍니다.”
과연 마음이 놓이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막 시작한 사람이니까 어제가 없었다. 내일은 알 길이없었다. 오늘은 오늘의 아사나와 고통만 있었다. 어떤 날은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어떤 수업이든 들어가서 할 수 있는 데 까지만 하면 돼요. 괜찮아요. 못하면 어때? 재미있을 거예요.” 웃으면서 말씀하시던 선생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수업 내내 외롭고 곤란했는데, 그렇게 예쁘고 선한 에너지 속에 뚝 떨어진 운석 같았다. 차갑고 딱딱한데 무겁기까지 해서 누가 선뜻 움직이기도 엄한 덩어리.
하지만 이 모든 몸과 마음의 고통과 고뇌는 다 30분~4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감각은 정말 썰물처럼 사라졌다. 오늘도 많이 모자란 나였지만, 그래서 조바심 내고 애쓰면서도 어쨌든 해냈다는 성취감이 있었다. 마술 같은 감각, 야속하기만 했던 선생님의 말씀을 몸으로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심신의 곤란함과 아픔은 영원 같았지만 딱 끝나면 천국 같았다. 시계를 볼 때마다 믿기지 않았다.
수업은 웜업으로 몸을 풀고, 흐름을 타면서 자세를 익히고 버티다가 쿨다운으로 이어졌다. 긴장했던 근육을 풀어주고 땀을 식혔다. 마지막은 ‘사바사나’였다. 팔과 다리를 적당한 간격으로 벌리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가만히 누운 자세. ‘송장자세’라고도 한다. 마치 죽은 듯 누운 자세라는 뜻이다. 약 5분의 시간, 결정처럼 모였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흩어지면서 숲처럼 고요해졌다. 어떤 날은 마음까지 다 흩어져 사라진 것 같았다. 볕도 바람도 좋은 계절엔 딱 이 순간에 창문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땀으로 흥건해진 몸 위로 바람이 불었다. 수련을 마칠 때마다 봄처럼 노곤했다.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은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갈까 말까의 고민, 고통에 대한 두려움, 아픔을 직면하는 순간, 버티고 버티는 시간을 지나야 평화를 맛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두려움과 고통은 옅어졌다. 그래도 고민될 땐 사바사나의 평화와 쾌감을 생각했다. 매트 한 장만 있으면 지구 어디라도 괜찮을 것 같은 심정, 이 위에서 땀 흘리고 누울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충만한 마음을 몇 번이나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 어려웠던 아사나의 이름에도 천천히 익숙해졌다. 다른 사람을 둘러볼 시간에 나를 챙길 수 있게 됐다. 발가락, 쇄골, 장골, 갈비뼈를 통제하는 세세한 감각에도 천천히 적응했다. 내 몸을 서서히 재구성하는 것 같았다. 발뒤꿈치가 바닥에 닿고 무릎이 펴질 때 느꼈던 성취감을 아사나마다 발견했다. 몇 개월 전의 오른손과 왼손은 강처럼 멀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딱 잡히던 순간의 낯선 쾌감. ‘내 배에도 근육이 있었구나!’ 자각하면서 내 몸에 미안해하던 순간마저 애틋했다.
그때, 요가의 세계는 냉정하고 정직해 보였다. 딱 수련한만큼만 허락하듯 열렸다. 대신 아무 것도 배신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는 믿음이 내 안에서 차곡차곡 단단해졌다. 그게 좋아서, 매일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일주일에 세 번, 한 달 열두 번의 수련은 꼬박꼬박 했다. 마감이 한창일 때도 매달리듯 수련했다. 끝낸 후엔 빼먹은 횟수를 채우려고 부지런했다. 고통과 두려움에는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피하지 않게는 됐다. 요가의 세계에는 끝이 없어 보였다. 그로부터 오는 막연한 평화가 있었다.
어쩌면 그 즈음부터였을까? 이게 다 과정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아가던 때였다. 냉정하지만 신사적인 이정표 앞에 혼자 서서, 이제야 옳은 길을 찾은 것 같았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아주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