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후 열전 穰侯 列傳.
전쟁의 잔혹함과 권력의 무상함,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함께 읽어보자. <양후 열전>의 주인공 양후穰侯는 본명이 위염魏冉으로, 전국시대 진秦나라에서 여러 차례 재상을 지낸 사람이다. 소왕昭王의 외삼촌이자 섭정을 했던 선 태후의 남동생으로 권세가 높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이 많아 재산도 많았다. 양후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를 읽어볼까? "양후는 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땅을 넓히고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한때 천하에서 제帝라 일컫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서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게 한 것은 양후의 공적이다."
먼저 전쟁의 잔인한 면을 사마천의 문장에서 느껴볼까? "위염이 백기를 추천하여 상수 대신 장군으로 삼아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게 했다. 백기는 적군 24만 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 장군 공손희를 사로잡았다." "진나라는 양후에게 위나라를 치게 하여 4만 명의 목을" 베었다. "위나라는 진나라를 등지고 제나라와 합종을 맺었다. 양후는 백기, 객경 호양과 함께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를 치고 10만 명의 목을" 베었다. 이 3번의 전투만 합해도 전장에서 목이 베인 사람이 38만 명이나 된다. 38만 명, 머릿속에 그려지니? 한국전쟁 때는 더했다.
이제 권력의 덧없음을 사마천의 문장에서 느껴볼까? "소왕 36년에 상국 양후는 제나라를 쳐서 자기의 도읍을 넓히려고 했다. 이때 위나라 사람 범저가 기회를 틈타 자기의 주장을 진나라 소왕에게 말했다. 이에 소왕은 곧바로 범저를 등용했다. 범저는 선 태후가 제멋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일, 양후가 제후들 사이에서 권세를 떨치는 일 등을 말했다. 이에 소왕도 깨달은 바가 있어 상국 양후를 파면시키고 그 일족을 모두 자기들의 봉읍으로 가서 살도록 했다. 양후는 도읍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 지냈다." 파면당한 양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마천의 평가를 조금 더 읽어볼까? 양후는 "부유하고 존귀함이 최고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유세를 펼치자 신분이 꺾이고 권세를 빼앗겨 근심과 번민 속에서 살다가 죽었다." 앞서 말했지만 양후의 본명은 위염이다. 위염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소왕은 그에게 '양'이라는 이름의 땅을 주고 '후'라는 작위를 내렸는데 그래서 '양후'이다. 양후가 된 위염은 점점 더 땅을 사랑했고 사람들 마음 속에는 시기와 질시가 더 크게 자라났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더라. 매우 부자인 사람에게는 바짝 엎드리지만 적당히 부자인 사람에게는 침을 뱉는다.
자, 이제 <양후 열전>을 정리해보자. 전쟁은 잔인한 것이다. 그리스의 어떤 학자는 전쟁을 일컬어 "잔혹한 교사"라고도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1953년 이후로 계속 휴전 상태이며, 전쟁의 상흔은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권력 또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권력을 갖기 위해 반대파를 비방하고 숙청한다. 그렇게 해서 권좌에 올라도 늘 편안한 게 아니어서 끊임없이 주변을 의심한다. 권력 근처에는 이익을 나눠 먹는 자들도 많아 그 이익이 조금 적다 싶으면 기를 쓰고 달려든다. 선한 권력이라는 건 결코 없다. 어딘가에는 탈이 난다.
**
추석 연휴를 신나게 보내고 와서 <사기 열전>의 열 세 번째 이야기 <백기 왕전 열전>을 읽어보자.